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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舊譜)의 서문
만력(萬曆) 28년 경자(庚子) 계추(季秋) 초하루 (선조 33년, 1600년 9월 1일)


족보는 사람의 대체(大體)가 되고 서문은 사람의 대용(大用)이 된다. 그 대체가 보배가 아니겠으며 그 대용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족보로 보배를 삼는다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배일 것이요 서문으로 믿음을 삼는다면 반드시 믿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큰 믿음인 것이다. 보기에는 대체가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삼족(三族)에 이로움 이 있고 말하기에는 대용이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만성(萬姓)에 믿음이 있는 것이다. 대저 이러한 연후에야 족보다운 족보라고 할 수가 있고 서문다운 서문이라고 할 수 가 있는 것이다. 탁씨(卓氏)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해 보면, 한 몸이 시작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백세의 마침으로 자손을 삼는 것이니, 시초에 견고한 시조의 뿌리가 있고 마침에 무성한 자손의 가지가 있고 보면, 그 선조가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알고 싶어지는 것이요 그 후손이 어느 나라의 신하가 되었는지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천자의 나라에서 벼슬을 한 것은 몇 백세 대 동안이었는지를 알지 못하나, 제후(諸侯) 왕을 섬긴 것은 다만 15세대 동안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지위와 명망이 어떠하며 그 충효와 학행이 또한 어떠한가. 오직 그 나라 에 있어서 성을 하사하여 탁씨(卓氏)라 하고, 그 땅을 봉해서 광산(光山)이라 하였다. 탁씨 로 성을 삼은 것은 조(趙) 나라와 한(漢) 나라에 길이 전한 바가 있고 광산으로 관향(貫鄕) 을 삼은 것은 고려와 조선에 세향(世享)한 바가 있으니, 이는 대개 이치로써 말한 것이지 형세로써 논한 것이 아니다. 이 족보는 광산군(光山君)을 현조로 삼았는데, 그 관향이 다른 자는 대개 죽정공(竹亭公) 의 조부와 부친의 형제에서 갈려 나간 것이다. 그 계파는 한번만 열람하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구보(舊譜)는 전후가 있는데 오래동안 미약하던 끝에 전열(前烈)을 추념하여 반드시 그 옛것을 새롭게 함이다. 아, 사람으로서 족보를 분명히 아는 자는 모두 그것으로써 종족을 수습하고 풍속을 돈후 하게 하며 충의를 세우고 조정을 이롭게 한다. 무릇 이 족보에 기록된 자가 어찌 각기 전열 을 추념하여 효제의 마음이 유연히 생기지 않겠는가. 그 세보(世譜)를 살펴 보건대, 광산군(光山君)은 휘가 지엽(之葉)이요 자(字)는 옥립(玉立)이며 호는 학포(學圃)요 시호는 문성(文成)이시다. 어릴 적에 광산(光山) 김문정공(金文正公)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번연히 복지(卜地)의 계획을 각오하고 개연히 도해(蹈海)의 뜻이 있어서 즉시 과거공부를 버리고 경서(經書)를 안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드디어 서석(瑞石)의 남쪽에 터를 잡고 일실(一室)을 쌓아 서석(瑞石)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 고는 광산(光山) 정처사(鄭處士) 문경공(文景公)을 벗삼아 지냈는데,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 풍절을 고상하게 여겨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견주었다.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계시니, 사방의 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고려(高麗) 선종 (宣宗) 때에 사방의 학자들이 학업으로써 상소하고 천거하였으므로, 일어나 왕명을 따랐다. 상이 이르시기를, “오직 공 한사람이다.”라고 하고 특별히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하였 다. 누차 승진하여 태사(太師)에 이르니 상이 이르시기를, “어진 재상으로는 공이 제일이 다.“라고 하시며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였다. 그래서 그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貫鄕)을 삼 았으니, 이치상 당연한 일이었다. 휘가 도민(道民)이신 분의 자(字)는 덕로(德老)요 호는 남헌(南軒)이요 시호는 충정(忠靖)이요 관직이 제학(提學)으로서 부원군(府院君)이 되기까지 하였는데, 이분이 학포공(學圃公)의 아드님이다. 휘가 원광(元光)인 분은 자는 관국(觀國)이요 호는 치재(恥齋)요 시호 는 익성(翼成)이요 관직은 참정(參政) 부마(駙馬) 광성군(光成君)이었는데 남헌공(南軒公) 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사정(思正)인 분은 자는 욱보(勖甫)요 호는 경암(敬菴)이여 시호는 평후(平厚)요 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었는데 치재공(恥齋公)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종 성(終成)인 분은 자는 해조(海朝)요 호는 운암(雲菴)이요 시호는 정숙(貞肅)이요 관직은 제 학(提學) 해양군(海洋君)이었는데 경암공(敬菴公)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영(英)인 분의 자는 중화(仲華)요 호는 둔재(遯齋)요 시호는 소간(昭簡)이요 관직은 평장사(平章事) 무진(武珍伯)이었는데 운암공(雲菴公)의 아드님 이시다. 휘가 문위(文位)인 분의 자는 숙장(叔章) 이요 호는 천곡(泉谷)이요 시호는 문민(文愍)이요 관직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둔재공(遯齋公)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광무(光茂)인 분은 자가 겸부(謙夫)요 호는 경렴(景濂)이요 시호 는 문정(文正)이요 관직은 제학(提學)이었는데 천곡공(泉谷公)의 아드님이시다. 이로써 그 지위와 명망과 충절이 옛날부터 훌륭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휘가 신(愼)인 분은 자는 계위(係危)요 호는 죽정(竹亭) 이요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관직은 찬성(贊成)이었고 효행과 이학(理學)으로 또한 세상에 이름 을 떨치었는데 경렴공(景濂公)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희립(希立)인 분은 자는 이성(而聖)이 요 음직으로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는데 죽정공(竹亭公)의 아드님이시다. 휘가 중(中) 인 분은 자는 건정(建正)이요 호는 죽림(竹林)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전적(典籍) 벼슬 을 하다가 치사(致仕)하고 점필재(??齋) 김문간(金文簡) 선생과 함께 종신토록 학문을 논 하여 별세하신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니 현감공(縣監公)의 아드님이시다. 그 밖에도 사인공(舍人公), 예빈공(禮賓公), 상사공(上舍公), 훈장공(訓將公) 등이 아름다운 자취를 이었으니, 만고(萬古)에 이 탁씨(卓氏)요 만고(萬古)에 이 광산(光山)이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세(前世)를 빛내고 후세(後世)를 여는 도가 어느 집안이 이보다 더함이 있겠는가. 일자(日者)에 광산군(光山君)의 16대손 세영(世英)이 개연히 병화(兵火) 이전의 가첩(家牒)과 과보(科譜)를 고증하여 근거를 삼아 그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였으니, 족보에 밝다고 하겠다. 바야흐로 노령에 있으면서도 그의 아우 세형(世亨)과 함께 먼 길을 와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으니, 그 뜻이 또한 근실하였다. 이 족보를 보는 세상 사람들은 그 선업 구덕(舊德)에 필시 흥기하여 감탄을 할 자가 많을 것이다. 누가 다시 그 후손이 떨치지 못했다고 하여 경시하겠는가. 아, 우리 선조 대간공(大諫公)의 배위(配位)는 광산(光山君)의 9대손인 죽정(竹亭公)의 따님이시니, 내가 죽 정공에게는 대개 외손의 의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슬프게도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병란을 누차 겪어 비록 문헌은 증거할 수 없으나, 내가 이 서문에 어찌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모방 하지 않겠는가. 입으로 거론할 뿐만 아니라 또 글로 쓰나니 비록 외손의 불행이기는 하나 실로 만세(萬世) 탁씨의 크나큰 다행인 것이다. 외예(外裔) 청주(淸州) 정백곡(鄭栢谷) 곤수(崑壽) 삼가 씀.

경자보(庚子譜)의 序文

경자(庚子譜)의 서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탁씨가 광산(光山)에 봉해진 지 현조(顯祖)로부터 16세가 지났다. 연대는 점점 멀 어지고 병란을 누차 겪었으니 선세(先世)의 사업을 무엇을 통해 알겠는가. 내가 이에 견문 을 널리 더하여, 혹 고려사(高麗史)에서 채집하고, 혹 여러 비문(碑文)에서 취하고, 혹 문선(文選) 승람(勝覽) 및 청구(請求) 명한(名翰)에 실려 있는 것을 취하고, 혹 읍지(邑誌) 표음(表陰) 및 명현(名賢)집고(潗稿) 등에서 등출해 내고, 혹 만성보(萬姓譜) 및 잠영보(簪纓譜)에 서 상고하고, 혹 사판적(仕版籍) 및 과방목(科榜目)에서 자료를 얻고 그리고 외가래파(外家 來派)를 모아 편집하여 세보(世譜)를 만드니, 지금 그 전서(全書)는 비록 볼 수가 없으나, 전기에 섞여서 나온 것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상하 수백년 사이에 혹 벼슬을 한 차례와 생 년(生年) 휘일(諱日)이 잘못되어 있는 곳도 있고 분파(分派) 항렬(行列) 배위(配位) 묘소(墓所)가 빠진 것도 있으니, 형세상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증거를 찾아 바로잡지 않 을 수 있겠는가. 아, 무릇 사람이 나는 것은 모두가 한 사람에게서 근본하여 자손 형제 숙질이 되는 것이 며 복(服)이 없는 먼 백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로 말리암아 나오는 것이니, 근본에 보답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여 조상을 높이고 공경하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하고 어진 아버지와 효성스런 아들이 되고 우애있는 형과 공경하는 아우가 되기를 도모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 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고 드디어 가풍(家風)을 이룬다면 이는 보첩(譜牒)이 흥기하는 바 이다. 소명윤(蘇明允)이 이르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의 마음이 유연히 생길 것이 라고 하였는데, 이 뜻을 내가 백곡(栢谷)의 서문에서 보았다.
중춘(仲春) 하한(下澣)에 불초(不肖)손(孫) 세형(世亨)은 삼가 씀.

기해보(己亥譜)의 序文

보계(譜系)를 만드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주례(周禮)에 소사씨(小事氏)가 세계 (世系)를 정리하고 소목(昭穆)을 분변하고 성원에 씨족을 기록함으로부터 구양씨(歐陽氏)와 소씨(蘇氏)의 족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인심을 통섭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뜻을 남긴 것이다. 그러니 우리 동방에서 성을 가진 종족은 대개 사람마다 집집마다 족보를 간직하고 있으며, 사방에 널리 퍼져 사는 후손들로 하여금 주련을 꿰듯이 이어서 한 성씨의 족보를 이루어 자손 대대로 무궁하게 전하는 가보를 삼게 하지 않는이가 없다. 노천(老泉)이 이른 바 효제의 마음이 유연하게 일어나리라고 한 것은 실로 보계(譜系)의 도움이다. 홀로 광산(光山)의 탁씨가(卓氏家)에 죽정(竹亭) 문정공(文貞公)이 있어 문학과 덕행이 있음으로 해서 한 성씨(姓氏)의 비조(鼻祖)가 되었고, 내려와 사인공(舍人公) 훈장공(訓將公)등의 제공에 이르러 아름다운 자취로 후덕을 이어 문호를 재창하였으나, 자손이 점점 미 약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백여년 사이에 관위(官位)와 사적(事蹟)이 당세에 드러날 만한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건연(巾衍) 사이에 겨우 한두 계파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일찍 이 온전한 족보를 다듬고 찬수하여 자손에게 물려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되면 더욱 민멸되고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게 될까를 염려하여 드디어 옛 족보를 인하여 대략 계파를 더하고 사방에 흩어져 사는 족성들을 기록하고 장차 널리 묻고 찾아서 자세히 상고하고 갖 추어 기재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탁군 재룡(卓君在龍)이 책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고 서문을 써서 그 전말(顚末) 을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책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긴 것은 진실한 이치이다. 탁씨 는 처음에 고려 때부터 이미 높은 벼슬을 한 훌륭한 분들이 있었고, 죽정공(竹亭公)은 조 선조에 들어와서 지위가 재상(宰相)의 반열에까지 이르렀으며 효행(孝行)과 심학(心學)이 있었는데 지지(地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분의 이력(履歷)과 사업(事業)의 실적은 비록 자 세하게 알 수 없으나 그 원두(源頭)와 근본(根本)은 또한 깊고 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파류(派流)가 점점 흘러 내려오고 후손들이 중간에 쇠퇴하여 스스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가 없다. 비록 그러나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돌이키는 이치가 있으며, 사람의 일이 천리 (天理)를 이기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지금 제군(諸君)들이 바야흐로 종족(宗族)을 거두고 보계(譜系)를 밝혀서 근본을 보답하고 추모하며 조종(祖宗)을 존경하는 도리를 생각하는 데 에 뜻을 두었으니 또한 힘쓸 바를 알고 있다고 하겠다. 흥하고 쇠하며 떨치고 폐하는 하나 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근본을 돌이키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죽 정공(竹亭公)이 자신을 계칙(誡飭)한 바를 가지고 각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곳은 조상의 자취를 이어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고 가학(家學)의 근원을 거슬러 올 라가 성리학(性理學)의 오묘함을 연구하며, 바탕을 숭상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여 안으로는 집안을 풍요롭게 하는 상서(祥瑞)가 있게 하고, 참된 공적(功績)을 쌓아 영화가 발현되게 하여 밖으로는 어진 인재들이 줄지어 나오는 길함을 얻는 것이다. 조상을 빛내고 후손을 여는 방법에 있어서 어느 것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죽정공과 나의 선조 목은공(牧隱公)이 서로 주고받은 작품들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죽정공에게 사제(師弟)의 의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아, 슬프다, 탁씨의 쇠퇴가 너무 심함이여. 이로써 제군들을 도와 한갓 수집하고 엮어서 족보를 완성한 것으로만 다행으 로 삼아서, 그 마음쓴 바를 알지 못한다면 안될 것이다. 제군들은 유념 하겠는가. 기해년(己亥年) 계춘(季春) 상완(上浣)에 한산(韓山) 이상정(李象靖)은 서문을 씀.
광산 후인(光山 後人) 탁정운(卓鼎運)과 탁재룡(卓在龍)이 그 세보(世譜) 한 책을 가지고 호상(湖上)의 이선생(李先生 : 李象靖)을 찾아 뵙고 글을 받아 서문을 삼고 다시 내게 일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광산 탁씨는 원래 죽정(竹亭) 문정공(文貞公)으 로부터 높은 벼슬을 대대로 하여 우리 나라의 저성(著姓)이 되었다. 중세에는 훈련대장(訓練大將) 휘(諱) 순창(順昌)이 명망이 있는 장수로서 초연히 떨치고 와룡산(臥龍山)에 들어 가 은거하였고, 5대손 휘 일길(一吉)에 이르러서는 어릴 때 외로이 되어 형제가 없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병란을 피하여 칠파(漆巴) 사이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다행 히 돌아와서 농사와 낚시를 업으로 삼았다. 자손들이 이 뒤로부터 영락하고 쇠퇴하여 구가(舊家)의 문헌에 증거가 없게 되었다. 지금 후손 정운과 재룡이 능히 문묵(文墨)에 종사하여 사우(社友) 간에 존경을 받아왔는데, 이윽고 정씨 만성보(丁氏萬姓譜)를 얻고 또 가승(家乘)을 참작하여 족보를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다. 아, 천하의 이치는 드러나면 어두워지고 어두우면 드러나는 법이니, 죽정공(竹亭公)의 시 대가 오늘날에 다시 드러남이 아니겠는가. 지금이 바로 흥하고 쇠하고 떨치고 폐해지는 기회이니, 제군(諸君)들은 더욱 스스로를 힘쓰고 행의(行義)를 돈독하게 하며, 학문을 숭상하여 선대의 공업(功業)을 회복하라. 그러면 이웃과 친구들도 또한 같이 그것을 행하게 될 것 이니, 힘쓰도록 하라. 족보를 만든 전말(顚末)은 서문에 자세하니 내가 거듭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탁군이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므로 몇마디 적어서 돌려 보낸다 완산(完山)류도원(柳桃園) 씀.
나는 같은 마을에 사는 탁씨 제군이 세렴(世濂) 효렴(孝濂)과 더불어 서로 잘 지내는 사이이나 그의 선세(先世) 사적(事蹟)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루는 그 새로 찬수한 세보(世譜) 한 질을 보았더니, 고려시대(高麗時代)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그 계파(系派)와 인물이 많았다. 그 중 달관(達官)과 거인(巨人)으로는 간의공(諫議公) . 의정공(議政公) . 사인공(舍人公) . 훈장공(訓將公) 등 제공(諸公)이 더욱 드러났다. 내가 이에 탄식 해 이르기를, “탁씨의 선조가 그 훌륭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중간에 침체하여 떨치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남을 말할 때 문벌(門閥)의 높낮이만 따지고 그 근본과 원두(源頭)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근래의 관직 높낮이만 비교하기 때문에 현조(顯祖)가 있는 탁씨와 같은 경우는 세대가 이미 멀어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깊은 산골에 침제되어 살고 또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도 없으니, 이것을 어찌 후세의 풍 속이 야박해서 그렇다고만 하겠는가. 보계(譜系)가 분명하지 못한 까닭도 있는 것이다. 이 제 제군들이 이 일에 성의를 가지고, 원근(遠近)의 족성(族姓)들을 순방하고 제가(諸家)의 문적(文籍)을 참고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책을 만들었으니, 조만간에 이 보첩(譜牒)이 간행되면 사람들이 모두 탁씨는 훌륭한 조상의 후예요 국중(國中)의 저성(著姓)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이후부터 탁씨는 다시 진발(振發)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군(諸君)들은 훌 륭한 후손이라고 하겠다. 대산(大山) 이선생(李先生)이 서문을 쓰고 남간(南澗) 유공(柳公)이 이어 발문을 썼으니, 그 그윽한 영광을 천양(闡揚)하고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뜻이 또한 성대(盛大)하도다. 두 분의 신필(信筆)은 충분히 일세에 바탕이 되고 영원히 전하리니, 나의 말을 어찌 그 사이에 넣을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제군(諸君)들의 청이 매우 간절하여 아무리 사양을 해도 되지 않으므로 삼가 이렇게 써서 돌려 보낸다. 문소(聞韶) 김도행(金道行) 씀.
탁씨의 세보(世譜)는 원릉(元陵) 기해년(己亥年)에 이루어졌다. 선군자(先君子) 대산선생(大山先生)이 그 책에 서문을 써서 세상에 행한 지가 백 여년이다. 하루는 탁군(卓君) 염(恬)과 정(楨)과 한(翰)이 그 족보를 가지고 와서 말하였다. “탁씨는 안동(安東)이 종파(宗派)가 되고, 족보는 기해년(己亥年)에 간행한 것이 정본(正本)입니다. 근래에 관서(關西)의 족인(族人)인 전 우시랑(前右侍郞) 운한(雲翰)은 문경(聞 慶)에 이사와 사는 자로서 그가 새로 간행한 족보를 가져와서 보여주기에 열람해 보니, 상 고한 근거가 실상을 잃고 소루함이 많았으며 기해년에 안동(安東)에서 만든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 크게 다른 것만을 들어 말하자면 선조(先祖) 후 15세손 송암공(松菴公) 휘 순창(順昌)은 아들이 네 명으로 휘 세영(世英) · 세형(世亨) · 원정(元貞) · 세공(世恭)인데, 저 족 보에서는 세영의 자손은 전계(典系)하지 않았고, 원정과 세공은 완전히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기해보(己亥譜)를 만들 때에 족선(族先)으로서 선선생(先先生)에게 글을 청한 이는 재룡 (在龍)으로서 휘 세영의 9대손이요, 노애(蘆厓)에게 글을 청한 이는 정운(鼎運)으로 휘 원 정의 7대손인데도 모두 저 족보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예전에 제대로 상고하지 않았 고 오늘날에는 실상을 잃었으니 제대로 된 족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운한(雲翰)에 게 없애버리라고 하니, 운한이 족보의 잘못된 것을 알고서 자신이 돌아가는 즉시 고쳐서 바로잡겠다는 말을 하고 갔는데, 얼마 안되어 운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이곳 에서 중간(重刊)하여 저 족보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저희들이 원하건대 선선생(先先生)의 옛 은혜를 이어서 한 말씀 서문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 내가 이 말을 듣고 오래도록 사양을 하다가 말하기를, “이는 저 족보에서 우연히 빠진 것이다. 나는 운한 시랑과 더불어 조정(朝廷)에서 자주 대면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순박하고 근실하며 시속(時俗)의 악착스러운 이들과는 다 른 사람이니 어찌 고의로 이렇게 하였겠는가. 더욱이 서로간에 거리가 멀고 문헌(文獻)의 증거가 없으며, 또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하여 족보를 찬집할대에 저절로 쉽게 사실과 멀어져 소루하게 된 폐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시랑(侍郞)이 고쳐 바로 잡겠다는 말은 이미 당일 수작(酬酌)할 때에 나왔으니, 저것은 이미 쓸모없는 족보요 이미 버렸어야 할 책이다. 새로 간행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조 보법(譜法)은 세대의 계통 을 정리하고 소목(昭穆)을 분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실로 이륜(彛倫)의 가르침을 돈독 히 하고 천륜(天倫)을 순서 매겨, 조선(祖先)을 본받는 한결같은 훈계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보건대, 지금 사람들이 왕왕 이 일로써 서로 다투고 힐난하며 심지어는 문호(門戶) 가 분열되고 검극(劒戟)이 서로 찾는 데에 이르니 이것이 어찌 한 할아버지에게서 일체(一體)로 태어난 자들이 할 일인가. 이제 시랑이 족보를 잘못 간행한 것에 대해서는 안동파(安東派)가 고쳐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각자 신중히 하여, 문경파(聞慶派)는 잘못을 속히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고, 안동파는 이전의 잘못을 소급하여 바로잡는 것으로 뜻을 삼아서 서로 서로 잘 의논하여 완본(完本)을 만드 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정선생(程先生 : 程子)이 이른바 이륜을 돈독히 하고 풍속을 두터이 한다는 것과 선군자(先君子 : 李象靖)가 이른바 조상의 자취를 받들어 효제의 도리를 극진히 한다는 것을 장차 여기에서 얻게 될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서 문으로 써서 돌려 보낸다. 기해(己亥) 후(後) 백일년(百一年) 기묘(己卯) 명선절(鳴蟬節)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승정원(行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한산(韓山) 이돈우(李敦禹)는 서문(序文)을 씀.
탁씨 족보는 탁씨의 겨레를 보계(譜系)로 한 것이다. 탁씨는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 로 하며, 도덕(道德)과 문장(文章)과 훈업(勳業)과 절혜(節惠)가 고려사(高麗史)와 역사책에 환히 드러나 있다. 그 비조(鼻祖)는 학포선생(學圃先生)으로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누차 천섬(薦剡)에 오르시어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그 후 7세의 연몽(連蒙)한 절혜(節惠) 와 청이(淸彛)한 의덕(懿德)이 보첩(譜牒)에 밝게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 현인들의 찬 술에도 갖추 기록되어 있다. 경렴정선생(景濂亭先生)과 같은 분은 포은(圃隱). 목은(牧隱) 제공과 더불어 서로 벗하 여 친하게 지내시어 서로 주고 받은 작품이 남아 있으니 대개 그 지조와 절개가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다.
아름다운 뜻을 지니시고 물러나 광산(光山)에서 노년을 보내시면서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고 그 곁에다 정자를 짓고 경렴정(景濂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대개 염계선생(濂溪先生)의 연꽃 사랑함을 우러러 받든 것이다. 그 어진 아들과 착한 손자에 죽정(竹亭) . 죽림(竹林) . 죽오(竹塢)가 잇달아 나와서 한 지역 안에서 어버이의 가업을 이어 나가니 후생들이 바라보며 사모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리키며 모두들 말하기를,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어도 그 터는 아직도 있구나 하고 수 백년이 지나도록 찬사가 그치지 않았다. 중엽에 와서 가문의 명성이 점점 쇠하여져 서남쪽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같이 이름있는 조상의 후손들로서 침체되어 일컫는 이가 없어졌으니 또한 어찌 세도(世道)의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취를 숨기고 한미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충성심과 의리만은 지녀서, 나라에 난리가 있을 때마다 문득 창의하여 난리에 달려나가 목숨바쳐 싸우고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한 일들이 모두 읍지(邑誌)와 전사(戰史)에 실려 있다. 그런데도 탁씨의 가법 이 겸손과 사양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위로 알려져 포상을 받기를 바라지 아니하였다. 이런 점이 또한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내가 일찍이 나복산인집(蘿?山人集)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경렴정운(題景濂亭韻)이라는 글이 있었고, 또한 일계집(逸溪集)에는 만경렴사(輓景濂飼)라는 글이 있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탁씨 집안과는 선대에 잘 지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경렴선생의 풍도을 더욱 우 러러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실적을 상세히 알지 못하여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은 지 가 오래되었다. 하루는 탁군(卓君) 재윤(在潤)과 재겸(在謙)이 그 보계 가운데에 실려 있는 도기(圖記)와 시문(詩文)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탁씨는 본래 드문 씨족으로서 오래 도록 족보를 찬수하지 않아서 서남쪽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이 장차 남남이 될 지경에 이르 렀습니다. 그래서 널리 고하여 알리고 그 파단(派單)을 거두어 모아 보책을 중간하고 있으 니 책의 첫머리에 실을 서문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선조 때의 우의를 생각하여 부디 사양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펼쳐서 보니, 애련도(愛蓮圖)와 탄금도(彈琴圖) 및 죽정(竹亭)의 유지(遺址)등에 그 당시의 당우(堂宇)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완연히 눈앞에 있는 듯한지라, 문득 옷깃을 여미고 도(道)를 묻는 생각이 일어 감히 공경치 않을 수 없었다. 다 만 그대들은 대대로 청빈함을 지켜왔는데, 족보를 간행하는 것은 큰 일인지라, 필시 그 비 용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조상을 위하는 정성과 친족을 돈독히하는 의리가 출중 하였다. 탁씨의 여러 족파들이 그선조의 대지(臺池)와 선영의 그림과 각파의 씨명과 혈맥의 계통을 보면 누군들 추연히 감동하는 바가 일어나고 분연히 의리의 마음을 내지 않으리요. 내가 국채보상금과 품팔이하는 부인 유자들을 모두 의무로써 보낸 자는 가히 위하여 증거 를 서리라. 대저 인지상정은 모두 자기 몸을 사랑하고 집안을 사랑하여 나라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이니, 탁씨가 이 보록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또한 그 몸과 집안을 사랑하는 데에 서 나온 것이다.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를 가릴 것 없이 필시 자금 내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로되 더구나 이 사람은 먼저 큰 금액을 부담하여 앞장선 자이다. 이로부터 탁씨 선대 의 덕업이 다시 드러나게 될것이다. 이는 탁씨를 위하여 축하할 일이다. 탁씨는 더욱 힘쓸 지어다. 누대의 빛나는 덕업과 탁월한 절의는 이미 구보의 서문에 실려 있으니 어리석은 내가 굳이 다시 서술할 일이 아니다. 광무(光武) 11년(十一年) 정미(丁未) 5월(五月) 상순(上旬)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 전 행의정부(前行議政府) 찬정(贊政)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김사준(金思濬)은 서문을 씀. * 광무 11년은 1907년을 가리킴.
씨족과 문벌을 서로 숭상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이다. 옛날에 주(周) 나라 소사(小史) 가 계세(系世)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변하여 이에 세본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실로 후 세 족보의 시초이다.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직에는 세주(世胄)가 있었 고 족보(族譜)에는 세관(世官)이 있었으니 명덕을 중히 하고 등위(等威)를 분변한 것이 지 극하였다. 그리고 송(宋) 나라의 구양수와 소식의 족보와 같은 것은 또한 이 씨족이 각각 족보의 원위가 있는 것이다. 우리 동방에서는 본디 세족을 중히 여겼는데, 신라(新羅) 고려(高麗) 이후로 고가(古家) 대성(大姓)의 유적(遺籍)과 왕첩(往牒)을 거슬러 상고해 보면, 관면(冠冕)과 규조(圭組)가 능히 세상에 빛난 것이 천백년을 하루같이 한 자는 참으로 드물게 보이고 기타 융성하였다가 쇠퇴하였다가 하여 일정함이 없이 수시로 변한 자가 대개 열에여섯 일곱이었다. 진실로 그까닭을 궁구해 보면 혹 덕에는 풍성함과 부족함이 있고 운수에는 오르는 것과 내리는 것 이 있어서 한 가지 이치로만 잡고서 정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심하다. 내가 탁씨 의 선대의 사적을 보건대, 그 드러나고 민멸되고 한 자취가 흥감을 이기지 못할 만한 것이 있었다. 대개 광산 탁씨가 문성공(文成公)을 비조(鼻祖)로 삼고 이로부터 아래로 무릇 육칠세가 혹 지위가 낭묘(廊廟)에 이르고 혹 직책 문원(文垣)의 장관에 이르기도 하여 환히 드러나 순순히 고려의 명문 거족이 되었다. 경렴공(景濂公)에 이르러서는 충정의 절조가덕은 찬연하였다. 권세 있는 간신이 멋대로 방자하게 굴던 때를 당하여 흉적을 제거하고 난리를 평정할 뜻을 품었었는데 얼마 뒤에 여 러 현인들이 파출을 당하고 외로운 충절이 분변되지 못하자 나이를 들어 벼슬을 물러나 산림(山林) 속으로 은거하였다. 절개는 원량(元亮)에 가깝고 지조는 무숙(茂叔)에 견줄 만하 였다. 익재(益齋)와 포은(圃隱) 목은(牧隱) 제공들이 칭송을 하며 추중한 것이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다. 죽정공(竹亭公)은 행실이 가정에서 드러나고 명망이 조정에서 중하여 단지 한 시대의 여 러 영재들이 서로 창수한 글에서만 영탄한 것이 아니다. 명정(名亭)을 문채롭게 꾸며서 신 장에 빛이 감돌고 전석에서 힘써 강론하여 임금의 은혜가 융숭하였다. 우리 영조조에 지기 로 만나 중함을 입음이 또한 이러하니 역시 위대하지 않은가. 중엽에 미쳐서는 혹 국난에 충성을 바치다가 순절하기도 하고 혹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를 극진히 하기도하여 비록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나 모두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세상에 크게 떨쳐지지 못하였다. 뒷날 논하는 자가 진실로 탁씨의 천연함에 스러움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문성공(文成公)이 세상에 전한 가업과 경렴(景濂)과 죽정(竹亭) 두선생의 충효의 행실은 그 끼친 음덕으로 후예를 덮은 것이 장차 유구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찌 끝내 침체하여 드러나지 않고 그치고 말겠는가. 뒷날 구름이 일듯이 안개가 피듯이 흥성하여 그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은 마땅히 그러한 때가 있을 것이다. 이제 탁군 재윤(在潤)과 재겸(在謙)이 발이 부르트면서 천리 길을 와서 그 세고를 가져와 서 내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탁씨는 모두 문성공(文成公)의 후예들이다, 다만 종손과 지손이 나누어져서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족보를 통합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2백 여 년이 되었다. 모두 선조로부터 한 핏줄을 타고난 몸으로서 서로 남을 대하듯이 쳐다보게 되었으니 매양 근원은 하나인데 흐름은 나뉘고 사람은 바뀌고 세대는 성글어졌다는 말 을 생각할 때마다 개연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선휘(先徽)는 점점 멀어지고 문헌(文獻)은 날로 민멸(泯滅)되어가니 이것이 두려워서 이제 장차 여러 종파들과 함께 도모하여 유적을 널리 수습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찬수해서 길이 전하려고 한다. 청컨대 소중한 한 말씀을 권질의 첫머리에 서문으로 써 주시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보잘것 없는 내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선조의 덕업을 대략 서술하여 그의 근실함을 사례하는 바이다. 대저 보계가 종족을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두텁게 한다는 것은 정자의 가르 침에 모두 적혀있다. 어찌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다만 원하건대 탁씨의 제종은 능 히 그 선대를 생각하여 더욱 충효에 힘써서 옛 사람의 철보(鐵步)의 조롱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면 이 족보가 후승에 빛을 드리움이 장차 무궁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 단양(端陽)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전 의정부(煎議政府) 찬정(贊政) 겸홍문관학사(兼弘文館學士) 원임(原任)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시강원(侍講院)일강관(日講官) 해평(海平) 윤덕영(尹德榮)은 서문을 씀.
광산 탁군규하보(光山卓君 圭夏甫)가 장차 세보를 수선하려고 하여 나를 찾아와 은거의 오류를 보이면서 족보의 첫머리에 한마디 서문을 써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감히 할 수 없 다는 말로 사양을 하며 반복해 말하기를, “백곡(栢谷)과 대산(大山) 두 선생의 서문이 가히 백세에 자중할 수 있거늘 어찌 거기다가 덧 붙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우리 집안이 문정공(文貞公) 이후로 자손들이 각자에 흩어져 살아 미처 하나의 통일된 족보를 찬수해 이루지를 못하고지낸 지가 오늘날 거의 백여 년이 되었다. 우 리 선친께서 이것을 염려하여 세대가 바뀌도록 십여년 동안이나 애를 썼으나 오히려 성취 하지 못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 후생들이 역량과 현세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서두르며 일을 돈돈히 하고 선친의 뜻을 추술하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것이다. 널리 계파를 점검하고 세월을 보내는 것은 역량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단지 훈련공파(訓鍊公派)만 찬수하는 데에도 이 후손들을 또한 빠뜨리는 유감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경자년(庚子年)에 만든 족보와 계축년(癸丑年)에 만든 족보에 견주어 보면 이미 배나 잘된 것이다. 어찌 그 사유를 갖추어 기록하여 여러 후손들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여러 공들의 뜻이 정성스럽고 근실하도다. 대저 족보가 만들어진 것이 어찌 다만 선대의 덕을 기록하고 계통을 밝히기 위한 것일 뿐이겠는가. 이 족보로 효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이 족보로 돈목(敦睦)의 우의를 닦아서 안으로 근본을 돈후하게 하고 행실을 근실하게 하며 밖으로는 남의 업신여김을 막고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이다. 생각마다 죽정공(竹亭公)의 충효 대절을 본받고 조심조심 죽림옹(竹林翁)의 문학 아망을 추모하면 지초 뿌리와 단술의 근원이 그 오는 것이 나로부터 장차 계(契)를 잡음이 있을 것이다. 광산 탁씨가 일초로 다시 흥기하는 기회가 이루어져 이 수국보첩(數局譜牒)에 발전되면 소목공(召穆公) 종족을 규합했던 것과 범문정(范文正)이 친소를 균등하게 여겼던 일이 어찌 그 아름다움이 옛날 사람만의 독차지가 되겠는가. 만약 그렇지 아니하여 부형이 가르치는 방도가 없고 자제들이 겸손한 풍도가 적어서 문호가 분열되어 경조사에 서로서로 미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족보를 찬수하는 일이 한갓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하여 오는 후손들에 게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이 될 것이다. 소씨(蘇氏)가 이른바 “거의 서로 남남이 되지 않을 자라고 한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렇다 고 수긍하였다. 이미 제공들을 위하여 우고 인하여 이 말을 차례로 다 적어서 돌려 보낸다. 지금 이 일을 보는 자는 기업(基業)과 기홍(基洪)과 영수(永秀) 제군이다. 문적(文蹟)이 오래되어 분변하기 어려운 것과 종계가 뒤바뀌어 여기저기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은 다시 논란하지 말고 단지 일을 완성하기만을 기약하기 바란다. 때는 갑인년(甲寅年) 남지절(南至節)이다. 외예손(外裔孫) 완산(完山) 류회식(柳晦植)은 삼가 기록함. 주례(周禮)에 소사씨(少史氏)가 방국지(邦國志)를 담당하여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소목 (昭穆)을 분변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의 계첩(系牒)이 말미암아 생긴 근원이다. 성원과 씨족 지에서부터 구양(歐陽)과 소씨(蘇氏)가 지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족보라는 물건이다. 그러나 대저 이른바 족보라는 것은 한갓 그러한 물건일 뿐이겠는가. 반드시 선조의 아 름다움을 드러내고 후사를 열고 종족을 스습하여 풍속을 돈독히 하는 것이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진실로 선세의 아름다운 덕과 깊은 어짊이 앞에서 빛나게 계도하여 그 근본을 공고히 하 고 그 근원을 멀리 하여 무궁히 드리워서 이것으로써 돈독하고 화목한 풍습을 닦음이 있지 아니하면, 일체 화려함을 따르고 이름을 파는 자들이 아침에 영화롭다가 저녁에 쇠퇴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탁씨가 성을 받은 것은 처음에 한나라 포덕후(褒德侯)로부터 시작되어 멀리서로 전하여 동쪽으로 건너와서 광산(光山)에 씨족을 이루고 살면서 대대로 유명한 분이 있었다. 고려 말에는 또한 일찍이 높은 벼슬을 하여 세상에 드러났고 경렴(景濂)과 죽정(竹亭) 두분 선생 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충절이 진실로 일세의 사표가 되어 공업이 태상에 기록되고 문장은 보불 빛나서 울연히 국초의 저성(箸姓)이 되었다. 이어서 죽림(竹林), 죽오(竹塢), 송암(松菴) 제공이 있어서 서업을 후세에 이었는데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산림에 돌아가 노년 을 지내면서 권권히 가학으로 다반을 삼고 충효로 기지를 삼았다. 이는 마땅히 착하고 아 름다운 것을 모아서 자손들에게 경사를 남길 자가 장차 무궁할 것이다. 저 화려함을 따르고 이름을 팔아서 일시에 빛남을 과시하려는 자는 왕왕 명성이 쇠퇴하여 철보(鐵步)의 찾을 바가 없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유독 먹을 수 없는 덕과 먹을 수 없는 복이 족히 하늘 땅과 함께 영구히 간다면 그 뿌리가 깊어 잎이 무성할 것이요 그 근원이 멀어 흐름이 길이 이어질 것이다. 또한 아침에만 영화롭다가 저녁에는 시드는 자와 같이 견주어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 후승이 창하여 혹 영(嶺)과 관(關)에 유락하기도 하고 혹 교(嶠)와 호(湖)에 흩어져 살기도 하는데 경조사(慶弔事)에 서로 미치지 못하고 소목(昭穆)을 서로 분변하지 않아서 서로 남남이 되어버리지 않은 자가 드물다. 하루는 탁군 규하보(圭夏甫)가 그의 종인(宗人) 근씨(瑾氏)의 뜻으로 회식(晦植)에게 명 하기를, “우리 집안이 학포공(學圃公) 이후로 아직도 통일된 족보가 없는데 일찍이 백곡(栢谷)과 대산(大山) 두분 선생의 서문이 있었으나 세대가 멀어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처럼 점점 증거할 문헌이 없어져 갈까 염려가 된다. 이것이 후인의 유감이 아니겠는가. 이전 에 왕고(王考) 도사(都事) 영(?)께서 세고(世槁) 두 책을 간행하고 인하여 종합적인 족보 를 만들 뜻이 있었는데 거하고 머무름이 현격하여 갑자기 거두어 모으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뜻만 지닌 채 일을 성취하지 못하였다. 이제 기업과 영선보가 각성에 두루 고하니 제 족 파들이 모두들 즐거워하여 한 목소리를 내어 차례대로 계파의 단서를 정리하였다. 장차 판각하여 간행해서 널리 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머리에 서문을 쓰지 아니하면 그 본말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본디 우리 집안의 외손이니 이 때문에 서문을 청한다.” 라고 하였다. 회식(晦植)이 돌아보건대 하찮은 후생으로서 지식이 천박하고 글도 잘하지 못하니 어찌 족히 이러한 부탁에 부응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일어나 사양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는데도 더욱 굳게 요청을 하였다. 이에 다시 말하기를, “이것은 소사씨(少史氏)의 유산이다. 여러 군자들이 뜻을 두었으니 매우 성대한 거조이다. 그러나 그 근본이 있는 법이니, 선대의 공덕이 이로써 드러나고 후들이 이로 말미암아 통합되며 종족을 수습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이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돈독해진다면 족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청컨대, 선조들께서 몸을 단속하던 것을 가지고 그것을 본받아 날로 노력하여 덕을 힘쓰며 인을 쌓고 질을 숭상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할 것이며, 암암히 스스로를 닦아 효우의 행실을 법받고 겸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신칙하여 화목한 풍습을 펴서 근본을 세워 도가 생기게 하고 내실을 쌓아 영화가 발현되게 하라. 그러면 지금 이 통합된 족보를 만드는 일이 광산 탁씨가 다시 창건할 기회가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 회식(晦植)이 그 세 덕을 얻은 것이 더욱 상세하기 때문에 이것을 씀으로써 제공들을 돕고, 그리고 세상의 헛된 일을 힘쓰고 명예만 따르는 자들을 경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택할 바를 알게 하는 바이다. 유조(柔兆) 섭제(攝提) 1926(丙寅) 黃華節에 외예(外裔) 완산(完山) 류회식(柳晦植)은 서문을 씀.
병자년(丙子年)에 고쳐 만든 족보의 서문을 생각건대 우리 종계를 창설하고 개정할 적에 참으로 수고로웠고 고생스러웠다. 오호라, 선왕고(先王考)께서 성취하지 못한 뜻과 사업을 선자가 일찍이 계술하여 그 사업을 완성시켰으니, 우리 선백(先伯)께서 급급히 서둘던 바이다. 구보를 바로잡아 새롭게 하고 이에 이르시기를,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드니, 그 말씀의 속뜻을 상상해 보건대 또한 여운을 깊이 남기신 뜻이 있어서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를 기다린다.”는 전례대로 하시어 오늘날의 거조를 기다리셨던 것 인가 보다. 서문과 발문을 살펴 보건대 삼대의 유묵(遺墨)에 선조를 사모하여 애통해 하고 감개하게 느낀 정성이 천고에 환하다. 아, 고적의 실제를 모으는 것이 대개 창졸간에는 하 나 하나가 어려운 것이다. 또 지난 갑오년(甲午年) 봄에 서울의 종인(宗人)인 탁유문(卓有文)이 경렴정공(景濂亭公)과 죽정공(竹亭公) 두 분 선조의 유적(遺蹟)과 일고(逸藁)를 증보 한 것과 선계(先系)의 고려에서 조선까지의 광적(光跡)을 계승한 사적을 간행하여 본도에 배포하였는데 제종의 실록이었다. 서울의 모든 성씨의 보계와 집안의 세계도(世系圖)로써 변증해 보니 더욱 분명하게 변석되었다. 병자년(丙子年) 족보를 찬수할 때에 나와서 통합하 여 족보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깝다. 이제 믿을 만한 문헌이 있어도 그럭저럭 고식적으로 보아 넘기고 남긴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누가 탁씨 집안에 후손이 있다고 하겠는가. 나 불초한 소자가 슬프게도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여 이에 친족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여 그 빠졌던 것을 상세하게 하고 잘못되었던 것을 보충하여 국초(國初)의 현조(顯祖) 참찬(參贊) 문정공(文貞公)의 팔대조(八代祖)고려(高麗) 태사(太師) 광산군(光山君)을 비조(鼻祖)로 삼고, 그 아래로 그의 아들 현감공(縣監公)의 현손(玄孫)이 바로 나의 낙향하신 조부이신지라, 미루어 현원(玄遠)한 데에까지 미쳐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를 다하고 족파를 모두 상세하게 하여 친족의 의리를 분변하였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 족보의 내력이 있는 집안의 체모가 유감이 없을 듯하게 되었고 삼세가 남겨 후손에게 부탁한 책임을 또한 조금은 보답하게 된 것이다. 교정을 보아서 간행을 하니 편질이 이미 이루어져서 소목(昭穆)이 엄연하고, 연하여 기록한 차서가 비유컨대 근원이 멀어 흐름이 길고 뿌리가 깊어 가지가 무성한 것이 되었다. 지금 이후로는 질서 정연하게 전열을 빛내고 후예를 넉넉하게 하는 대경으로서 그 인심을 통섭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여 효도하고 공경할 마음이 뭉클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의칙이 될 것이니, 오직 마땅히 노천(老泉)의 말로 표준을 삼아 여러 종파들이 서로 더불어 힘써야 할 바인 것이다. 옛 족보의 서문과 발문을 특별히 이곳에다 옮겨 적은 것은 선인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창시하거나 개정한 사업을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되겠고 또한 족히 후승(後承)의 감법(鑑法) 이 되겠기 때문이다. 옛날을 우러러 보고 지금을 굽어보니 스스로 감격스러워 흐르는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다. 지난 번의 책의 첫머리에 서문을 쓰는 것과 같은 일은 나같은 소자가 어찌 감히 하겠는 가. 손모아 절하고 삼가 적어서 대략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도광(道光) 십육년(十六年) 병자(丙子) 유월(六月) 상한(上澣)에 불초손(不肖孫) 빈(彬)은 삼가 기록함.

광산 탁씨(光山卓氏) 족보(族譜) 서(序)

옛날에 명왕(明王)이 효우(孝友)와 목연(睦淵)으로써 천하에 정치를 행함에 이륜(彛倫)을 밝히고 씨족(氏族)을 중히 하여 본손과 지손이 백세토록 이어졌었는데, 시대가 내려와 왕의 은택이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끊어지자, 다시 사도(斯道)를 강구해 밝히는 일이 없고, 오직 족보를 찬수하는 한 가지 일이 선왕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탁씨(卓氏)의 선조는 한(漢) 나라 포덕후(褒德侯)로부터 시작되어 중세에 동국(東國) 사람이 되었다. 고려(高麗) 선종(宣宗) 때에 학포공(學圃公)이 광주(光州)에 서석정(瑞石亭)을 쌓고 도리(道理)와 인륜(人倫)을 강론하여 밝히니 세상 사람들이 유학(儒學)의 종주(宗主) 로 추앙하였고, 천거되어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가 태사(太師)로 승진되어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관향을 받은 이래로 부자(父子) 형제(兄弟)들이 잇달아 이름을 떨치었다. 남헌공(南軒公), 오헌공(梧軒公), 치재공(恥齋公), 구인재공(求仁齋公), 경암공(敬菴公), 여택재공(麗澤齋公), 운암공(雲庵公), 둔재공(遯齋公), 천곡공(泉谷公)이 가학의 연원으로 훈업을 크게 밝혀서 대대로 시호(諡號)의 은전을 받은 일이 역사책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천곡공(泉谷公)이 경렴공(景濂公)을 낳았다. 선생은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염계 선생(?溪先生)의 학문을 사모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과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산림에 물러나 지냈는데, 81세의 수를 누리셨다. 우리 조선조에 와서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추증받고, 두문동(杜門洞) 제현사(諸賢祠)에 향사되었다. 경렴공이 죽정공(竹亭公)을 낳았다. 죽정공은 효행이 있었고 성리학에 마음을 다하였으 며, 우리 세종(世宗) 임금 때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셨다. 상소를 올 려 변방을 방어할 거북선의 제도를 진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경렴공과 죽정공 부자는 안동(安東) 오계(梧溪)의 사당에 향사되었다. 송암공(松菴公)은 임진왜란 때의 호성공훈(扈聖功勳)으로써 훈련대장으로 계시다가 산림 에 물러나 지내셨는데, 거처하시던 곳에 문행목(文杏木)을 손수 심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찌를 듯이 굳게 자라 있다. 사람이 공의 덕행을 생각하고 그 나무를 애호하여 계를 모아 맡아 지키고 있다. 송암공(松菴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세영(世英), 세형(世亨), 원정(元貞), 세공 (世恭), 세겸(世謙)이다. 원정의 증손인 련(鍊)은 자(字)가 천보(天輔)였다. 국난을 당하여 총명한 소년으로서 의병을 모아 누차 승리를 하였으므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조정에 계문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마침내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였다. 세공(世恭)의 아 들 상(祥)도 의리를 위하여 순절하였는데, 추증하여 정려하였다. 호남충훈록에 기록되어 있 다. 상(祥)의 아들 율(?)은 자가 천인(千?)으로서, 아버지를 따라 순절하였는데, 효성으로써 정려되어 대대로 충효를 전하였다. 이른바 명문 거족으로서 조상을 빛내고 후손을 계도한 것이 어느 집이 우리 탁씨 집안만 하겠는가. 왕실에서는 훌륭한 임금을 만나 갑계맹권(甲契盟券)이 있고 광주(光州)를 수호함에 경조 입안(京兆立案)이 있다. 자손들이 온 나라에 널리 퍼져 수천 수만 명인데 한번 세도가 바뀌고부터 집집마다 깨우치고 전할 수가 없었다. 금년 봄에 죽정공(竹亭公)의 묘향(墓享)을 인하여 종족들이 많이 모여 족보 만드는 일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남북으로 나눠 살기 때문에 대동보(大同譜)를 만들기는 실로 어려웠다. 그래서 병인년에 만든 족보 책자에 의하여 증보하거나 산삭하여 보청(譜廳)을 설립하였다. 여러 구성원들이 모두 조상을 높이고 공경하며 인륜과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선례대로 담당할 사람으로 고창(高敞)의 주환(周煥), 서울의 창여(昌汝), 정읍(井邑)의 성록(成錄), 광양(光陽)의 예홍(禮泓), 화순(和順)의 기영(?英)과 기열(?烈), 익 산(益山)의 홍인(洪仁)과 원식(元植), 통영(統營)의 성현(星鉉), 양양(襄陽)의 주황(周璜), 안동(安東)의 장훈(長壎)과 성하(成河)와 세광(世光)과 세정(世定)을 선발하였다. 이들이 멀리 오백리를 와서 나에에 서문을 써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어찌 감히 쓸 수 있겠는가. 삼가 전후의 족보 서문을 살펴보건대, 정백곡(鄭栢谷), 이대산(二大山), 유노애(柳 蘆厓), 김우고(金雨皐)등 제현들이 나라의 전고(典故)를 해박하게 알고 유학(儒學)의 가르 침을 두루 상고하여 서문을 지어 덕업을 이루어 믿음직한 글을 세상에 전하였다. 돌아보건대, 어리석은 나의 천박한 분수로는 더 보탤 수가 없었으나 또한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구(?)와 복(復)이 오고 감은 천도의 떳떳함이다. 고가(古家)의 훌륭한 자손들이 강호에 멀리 흩어져 있음이 얼마나 되었는가. 나무는 뿌리에 숨었다가 오는 봄에 화려하게 피어날 것을 기다리고 용은 연못에 침거하 여 구오(九五)의 대인(大人)을 보면 이롭게 되나니, 오늘날 족보 만드는 일이 완성된 것은 참으로 땅속에 잠겨 있는 한 줄기 양기의 기운이다. 수천 수만의 집안이 차례로 열리리라 는 말로, 탁씨 집안에서 수찬한 족보의 서문을 삼는다.
정유년(丁酉年) 남지(南至)에 전주(全州) 유동익(柳東翼)은 서문을 씀. ※ 1957年(丁酉) 남지(南至) 전주 柳東翼 序 (本文 參照)

구보발(舊譜跋)

아, 우리 종계의 보첩(補添)을 전후로 무릇 일백여 년 동안 세 번의 개정을 거쳐서 비로소 바르게 되었으니, 선배들이 십분 심력을 기울여 해 놓은 일에 크게 볼 만한 점이 있고 후손들에게 다행스러움이 실로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나 불초한 사람이 종파의 후예로 있으면서 병자년(丙子年) 족보에 이미 참여하여 교정보는 일을 하고 발문을 썼고, 지금 또 다시 족보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그 일을 끝마쳐 새롭게 하였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아, 족보를 펴서 받들어 읽어보니 고려와 조선시대에 선대를 이어 벼슬을 누린 성대함과 가통을 이어 빛을 낸 자취가 환하여 책 사이에 찬란하다. 잘못된 것이 바로잡혀 수미(首尾) 가 차서가 있게 되었으니, 소목(昭穆)을 분명하게 이어 엄연히 존중의 체통을 이루었고 전 대를 빛내고 후손에게 물려주어 유연히 효자의 감흥이 일어난다. 이와 같구나! 보록(譜錄)의 귀중함이여. 마땅히 소노천(蘇老泉)과 구양공(歐陽公)의 족보에 한치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희옹이 이른바, 개정하면 할 수록 더욱 좋아진다고 한것이 또한 이 족보에서 증명이 된다. 용곡(龍谷) 족장(族丈) 빈씨(彬氏)가 그 사실을 서술하고, 못다한 말을 말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하였다. 무릇 일이 선대의 사적에 관계되는 것이고 보니 어찌 감히 글을 못 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금년 초 여름에 경기 · 경상 · 전라도의 종인들이 족보를 함께 만들자는 일로 통문을 냈 고 또 죽정 선조(竹亭先祖)의 일시(逸詩) 십여 수를 등사해 온 자가 있어서 어제(御製) 영시(詠詩) 및 동시대(同時代)의 명현들의 창수한 글이 있다고 하였다. 해규율수(海奎律髓)에서 나온 것도 많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차 기유년(己酉年) 세고(世稿)중에 다시 첩입하려고 하였으나 생각컨대 관(關)과 영남(嶺南)은 거리가 멀어서 갑자기 그런 글들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우선 보고들은 것을 기록하여 뒷날의 증거를 삼고자 여기에 덧붙여 적어 둔다.
도광(道光) 16년(1836) 7월 일 불초손(不肖孫) 정벽(廷壁)은 삼가 발문을 씀.

정미갑계태학통문(丁未甲?太學通文)
(갑계서원창건문(甲?書院創建文)이다)


오른편 글은 통유(通諭)한 일을 적은 것이다. 계회(계會)라는 말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다. 진(晉)나라에는 난정회(蘭亭會)가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향산회(香山會)가 있었으며, 송(宋)나라에는 기영회(耆英會)가 있었는데 이 모두 태평한 시절의 좋은 일이며 풍류의 아름다운 자취이다. 그때 같이 모인 사람들은 동경(同庚)이 아니므로 동경은 더욱 귀한 것이 된다할 것이다. 동경의 계가 또 어찌 잠룡(潛龍)때부터 시작하여 공(功)을 이룰 때까지 계 속된 한(漢) 나라 소렬(昭烈;유비(劉備)과 제갈충무(諸葛忠武)제갈량(諸葛亮), 송(宋) 태조(太祖)와 조측 평(趙側平)의 경우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 생각컨대 우리 태종공정성덕공신문무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功神文武光孝大王)께서 잠저 (潛邸)에 계실 적에 영후(英後)한 인물 20인을 얻으니, 큰 문세가 함께 창성하여 인재가 모 여들고 서로 추익(推翊)하여, 예권(睿眷)이 두터우며 선운(璇韻)이 계속 이루어져 “삼각산(三角山)이 무너져도 의는 남으리(三角山崩義不泯)”라는 글귀를 정녕 영탄(詠嘆)하면 당시의 성의(誠意)를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굳은 맹세가 옛날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정상(旌常)의 기록도 후세에 복유(福裕)를 내릴 것이다.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인사(人事)도 또한 변하여, 남은 후손들은 유락(流落)함을 면치 못하고 옛집도 적막하게 되었으니, 뜻이있는 사람들의 한탄함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지금 공의(公儀)를 무시하기 어렵고 사림(士林)이 다 함께 분발하니, 이로써 귀부(貴府)에 풍패(豊沛)의 마을이 있고 귀교(貴校)에 추로(鄒魯)의 기품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흠탄함이 심상치 않으니 바라건대 속히 완성하여 조두(俎豆)를 높이 받들어 우리 유림(儒林)을 빛내 고 여론의 광장을 펴고자 합니다. 전주향교(全州鄕校)에서 삼가 통지합니다.
갑오(甲午) 4월 일 태학(太學)

경향유사(京鄕有司)
호남도통(湖南道通)


이글은 통유사(通諭事)이다.
백년 전의 유현(儒賢)을 거향하고 풍성(風聖)을 천년 뒤에 세우는 것은 조가(朝家)의 좋은 법이며 사림의 훌륭한 일이다. 대개 광주(光州)는 호남(湖南)의 추로(鄒魯)이며 사부(士夫)의 부고(府庫)이다. 예(禮)로써 사양하고 의(義)로써 추창하며, 덕이 있으면 포상하고 의가 있으면 칭송하여 작은 마을과 큰 고을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표솔(表率)하니 추로(鄒魯) 의 명칭이 참으로 마땅하다. 향선생(鄕先生)에게 제사하는 의절로 빛나서 숭상 할 만하니 집집마다 정려(旌閭)가 있고 마을마다 조두(俎豆)가 있다고 하겠다. 오직 탁문정공(卓文正公)은 려말(麗末) 삼현(三賢)중의 한 분이며 장구지향(杖?之鄕)으로 향안(鄕案)의 맨 처음에 올랐으니 제사의 의례를 폐하지 못할 것인데 지금까지 제사를 못 지낸 것은 그 누구의 잘못인가. 선생의 훈도(薰陶)하신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고 사림의 흠모하는 마음이 세월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덕(德)도 부족하지 않고 의(義)도 불체(不逮)하지않으니 이는 일과 때가 서로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또 선생의 후손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때때로 성묘 하는 사람이 묵묵히 지나가면서 주(州)에서 같이 제사 모시는 것만 탄식할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선생의 후손과 사림이 마음을 같이하고 협조하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천년의 공의(公議)가 오늘에 흔쾌리 이루어지면 광주(光州)의 생색은 고사하고 자손의 도리가 정말 아름답지 않겠는가. 진주(晋州)와 고성(固城)에는 탁씨(卓氏)가 많이 있다고 하므로 우리들이 일이 많다는 혐 의를 무릅쓰고 구차히 멀리 귀읍(貴邑)에 알리니 이 뜻을 여러 탁씨들에게 전하여 일을 이루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공경히 여러 고을의 향교에 알립니다.
계사(癸巳) 정월(正月) 10일 전라도(全羅道) 광주도회(光州都會)

소학관통장(所學館通狀)

대성(大姓)과 혁벌(赫閥)이 어찌 본분(本分)이 있겠는가? 씨족이 번성하면 사람들이 대성(大姓)이라 말하고, 벼슬이 대대로 계속되면 세상에서 혁벌(赫閥)이라 칭하는 것이다. 근래에 영남도장(嶺南道狀)을 상고하니 비로서 광산 탁씨가 옛날의 대성혁벌(大姓赫閥)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평장사(平章事)를 세습 한 집안도 간혹 있지만, 대대로 덕학(德學)을 전하고 집집마다 충효(忠孝)를 이으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대를 전수하며 세상에서 선생 이라 부른 것은 신라와 고려시대 이래로 없었던 일이나 지금 탁씨족보를 보면 그것을 알수 있다. 이 때문에 산장(山長) 대료(大僚)와 진신(搢紳) 석유(碩儒)가 모두 옛일을 외우고 서(序)를 쓰며 시(詩)를 지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들이 외람됨을 무릅쓰고 구학 을 밝히고 후손을 생각하는 도리에 있어서 감히 말이 없을 수 없어, 삼가 백곡선생(栢谷先生);鄭崑壽)의 신필(信筆)을 상고하여 대략 서술하니 여러 군자들이 돌려보고 흥기함이 있으며 정녕 우리 유림에 있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탁씨의 비조(鼻祖)이신 학포선생(學圃先生) 문성공(文成公) 휘 지엽(之葉)은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었으며, 공부 배운 사람들이 가득하여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비유되 었다. 아들 남헌(南軒) 충정공(忠靖公) 휘 도민(道敏)은 벼슬이 제학(提學)인데 부원군(府院君)이다. 그 아들 치제(恥齊) 익성공(翼成公) 휘 원광(元光)은 부마(駙馬)로서 벼슬이 참정(參政)이고 광성군(光城君)이며, 그 아들 경암(敬菴) 평장사(平章事) 휘 사정(思正)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그 아들 운암(雲菴) 정숙공(貞肅公) 휘 종성(宗成)은 제학(提學) 을 지냈는데 해양군(海陽君)이다. 그 아들 둔재(遯齋) 소간공(昭簡公) 휘 영(英)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로 무진백(武珍伯)이고, 그 아들 천곡(泉谷) 문민공(文愍公) 휘 문위(文位)는 제학(提學)을 지냈다. 이상 7대는 도덕과 충훈이 일대(一代)에 드러나서 청사(靑史)에 실려 있다. 경렴선생(景濂先生) 문정공(文正公) 휘 광무(光茂)는 더욱 뛰어나서 고려의 제학을 지냈 는데 청직(淸直)함을 지키고 강호에 은거하니, 익재 이제현(益齊 李齊賢)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초은 이인복(憔隱 李仁復) ·야은 길재(冶隱 吉再) 등 여러 선생들이 모두 선생을 주무숙(周茂叔)에 비겨서 크게 경모하며 종유하였다. 태조의 잠저시에 서로 교분을 두텁게 하여 창화(唱和)한 것이 많았으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서 세상을 마치니 절의가 백세에 빛났다. 그 아들 죽정(竹亭) 문정공(文貞公) 휘 신(愼)은 성학(性學)에 전심하여 증자(曾子)에 비유되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곧고 밝으며 겸손한 훌륭한 재상으로 기록되었는데 후세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제 죽정시(題竹亭詩)에 “우리 나라에 증자(曾子)가 다시 태어났네”라고 하였고, 남구정(南龜亭) 재(在)의 만사(輓辭)에 “슬프다. 공의 신후사(身後事)는 문묘에 배향한다.”하였으며 태종(太宗) 임금 이 맹권과 신장에 “삼각산이 무너져도 의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하였으며, 세종 임금님과 는 제우가 더욱 두터워서 친히 만사(輓辭)에 “충성은 부열(傅說)에 비길만 하고 효성은 증자(曾子)와 같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수 백년 뒤에 태어나서 무엇을 보고 감동하겠는가? 선현의 남긴 글과 양조(兩朝: 太宗 世宗)의 지은 글을 미루고 우러러 보면 누가 선대의 어짐을 경모하고 그 자손을 아끼지 않겠는가? 죽정공(竹亭公)의 아들 휘 희립(希立)은 음관(蔭官)으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고, 그 아들 휘 중(中)은 전적(典籍)으로 치사하였는에 김(金) ·조(曺)등 여러 사람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불리어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 아들 휘 관(琯)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사인(舍人) · 검상(檢詳)을 지냈고, 그 아들 휘 광수(光守)가 효성으로 예빈사정(禮賓寺正)을 지냈다.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부정(副正) 강무공(剛武公) 증(贈) 훈장(訓將) 휘 순창(順昌)에게까지 계속되었다. 구 외 충효(忠孝)있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 니, 앞서 말한 소위 집안이 번성하여 대성(大姓)이고 벼슬이 계속되어 혁벌(赫閥)이라 한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는가? 옛 유적을 상고하면 우리 나라의 다른 집안에 비해 손색 없으나, 집안이 흥하고 쇠함도 또 한 이치라서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들도 차츰차츰 쇠하여 100년 사이에 가문의 명 성이 적막해졌으니, 아 슬프다. 이제 후손 유협(有協) · 준(俊) 등이 그 선세의 자취가 영원 히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의 신필(信筆)을 구하니, 조정에서는 수각(首閣) 총재(총宰) 가 글을 써주고, 산림(山林)에서는 유현(儒賢) 석사(碩士)가 많이 서문을 지었으니 공의(公議)가 있는 바이다. 이에 우리들이 또 통문을 내는 것은 탁씨가 있는 고을의 유림들로 하여 금 모두 탁씨 세력의 흥하고 쇠한 까닭을 알아서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바라건대, 통문이 도착하는 날에 한번 경향의 공의에 따라 일을 선처하며 만일 이 쇠한 운수의 시기에 우리 후손을 침탈하는 폐단이 있으면 사림이 소리내어 그 세력을 증명 하고 그 후손을 북돋워 선현을 드러내고 후손을 너그럽게하는 방편으로 삼고자한다. 공경히 여러 고을 향교에 통문한다.
경술년(庚戌年;1850) 팔월(八月) 일(日) 태학(太學)

회통(回通)

광산탁씨(光山 卓氏)의 누대의 덕학과 전가의 충효와 빛나는 업적과 벼슬, 국난에 의를 듬과 순절함 및 역대 임금의 맹권(孟券)과 신장(宸章)과 친히 지으신 만사(輓辭)가 해와 별 같이 빛남은 오고 간 여러 글을 상고해 보니 가히 동방의 성족혁벌(盛族赫閥)이라 하겠으나 후손이 침체하여 선적(先蹟)이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도 이를 두려워하였는데 금춘(今春)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나와 연맹로 탄원하고 공문으로 도백(道伯)에 올려서 바야 흐로 드러내고 밝힐 즈음에 한 소리로 응함을 받았으니 감히 감격하여 봉행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고을의 탁씨들도 보호할 겨를이 없지만, 다른 고을에도 같은 통문을 내어 모 두로 하여금 선현을 드러내고 후손을 너그럽게 하는 것을 알게 하겠습니다. 앙찬하여 주시 면 고맙겠습니다. 이것은 공경히 태학(太學)네 통문 보낸 것이다.
광(道光) 경술년(庚戌年: 1850) 11월 일 진주향교(晋州鄕校)
재임(齋任) 하진학(河鎭鶴) 이정규(李挺奎) 정은선(鄭殷善) 하필원(河必源)

광주사림발문(光州士林發文)

무릇 명산(名山)의 낙맥(落脈)이 비록 먼 들한에 이어졌으나 산을 보는 사람은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그 조봉(組峰)의 형세 때문이며, 향기로운 난초를 비록 심산벽곡에 옮겨 심어 도 향기를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 품종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거족의 후 손과 훌륭한 가문의 유예를 명산의 자락과 난초의 꽃에 비유하여 비록타향에 옮기고 혹 먼 곳에 흩어져도 거주하는 사람들의 대우가 특히 좋은 것은 참으로 씨족이 훌륭한 것과 근맥 (根脈)이 빛나는 것 때문입니다. 귀주(貴州;진주(晋州)에 사는 탁씨(卓氏)의 관향(貫鄕)은 비주(鄙州;광주(光州)로써 여말선초에 누 세동안 빛나는 명공거향(名公巨鄕)을 계속 이어서 해동(海東)의 거족(巨族)이며 호남(湖南) 의 현벌(顯閥)입니다. 문정공(文正公) 경렴선생(景濂先生) . 문정공(文貞公) 죽정선생(竹亭先生)은 태조대왕 잠저(潛邸) 시절에 포의(布依)로써 사귀었고 태종임금이 등극하실 적에 는 갑계도(甲?圖)를 내렸습니다. 그 도덕과 문장은 익재(益齋) .포은선생(圃隱先生)이 주렴 계(周濂溪)로 허여하셨고, 그 충효와 성학(性學)은 우암 선생(尤庵先生) 및 여러 명현들이 증자(曾子)로 칭하셨습니다. 국승(國乘)을 상고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과 향안(鄕案)과 행 적.명첩을 보면 환하게 실려 있습니다. 구기(舊基)와 유허(遺墟)로 비읍(鄙邑)의 이름난 곳 인 석지(石池) · 천곡(泉谷) · 흑석(黑石) · 황계(黃鷄) 등 여러 곳은 후생들이 우러러 공경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행인들도 손짓하며 느끼는 바가 있으니 당시의 빛난 자취가 오늘에 이른다 하겠습니다. 훌륭한 덕을 심은 누대의 고가(古家)로서 그 후손들이 많이 각 도에 흩어져 있어 관서 (關西)에서는 대대로 벼슬하여 훌륭하게 된 것은 경향이 다 아는 것입니다. 귀주(貴州)에 사는 것도 이미 오래되었으니 저희들은 명가의 후예로서 영남에서도 몇 안되는 사족(士族) 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 유락하고 잔열함이 과연 어떠하였기에 귀주의 향안과 원적 등에 혹 빠졌다는 탄식이 있습니까. 이것이 전하는 사람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진실입니까.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개탄과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옛 것을 당기고 오늘을 격동하여 일제히 소리를 내어 탁씨들에게 통유하오니 비유해서 말하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 이 명산의 남은 자락과 향초의 옛 뿌리라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탁씨의 문접을 살펴보시고 또 저희가 대략 쓴 것을 생각하시어 타향에 사는 잔 미한 성씨로서 볼 만한 것이 없다 마시고 특별히 대우를 해 주시면 천만다행입니다. 이것은 진주향교(晋州鄕校)에 공경히 통문한 것이다.
신해년(辛亥年;1851?) 11월 일
광주향교(光州鄕校) 재임(齋任) 정호묵(鄭好默)

함풍(咸豊) 임자(壬子;1825) 12월 일
광산탁씨정계금양입안(光山卓氏定界禁養立案)


무릇 영화와 사례는 이치의 상수(相須)인 바 선조가 후손을 외롭게 아니하는데 후손이 선조를 외롭게 하는 것은 어찌 된일인가. 광산군 탁공(光山君 卓公) 휘 지엽(之葉)은 호(號)가 학포(學圃)이며 시호는 문성(文成) 으로 여려서 문정 김선생(文正金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학업으로 천거되어 한학(翰學)에 특제되고 여러번 옮겨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광산군(光山君)을 봉 받았다. 그리하 여 자손들이 이를 관향으로 삼았으니 국승에 밝혀져 있다. 그 후에 휘 도민(道敏)은 호가 남헌(南軒), 시호는 충정(忠靖)으로 벼슬은 제학(提學)이며 부원군(府院君)이고, 휘 원광(元光)은 호가 치재(恥齋)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벼슬은 참정(參政)이며 부마(駙馬)인 광성군 (光城君) 이다. 휘 사정(思正)은 호가 경암(敬菴) 시호는 평후(平厚)로 벼슬은 판서(判書)이 고, 휘 종성(宗成) 호가 운암(雲菴) 시호는 정숙(貞肅)으로 벼슬은 제학(提學)이며 해양군 (海陽君)이다. 휘 영(英)은 호가 둔재(遯齋) 시호는 소간(昭簡)으로 벼슬은 평장사(平章事) 이며 무진백(武珍伯)이고, 휘 문위(文位)는 호가 천곡(泉谷) 시호는 문민(文愍)으로 벼슬은 제학(提學)이다. 휘 광무(光茂)는 호가 경렴(景濂)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벼슬은 제학(提學) 판서(判書) 를 지냈는데 광주(光州) 읍지(邑誌)와 입행보(入行譜)에 실려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신 (愼)은 호가 죽정(竹亭) 시호가 문정(文貞)으로 벼슬은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지냈는데 효 행과 이학(理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휘 희립(希立)은 음보(蔭補)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고, 휘 중(中)은 호가 죽림(竹林)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전적(典籍)으로 치사 하였는데 점필재(?畢齋) 문간(文簡) 김선생(金先生;김종직金宗直)과 학문을 논하였고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증직받았다. 휘 관(棺)은 호가 송당(松堂)이며 벼슬은 사인(舍人) 검상(檢詳) 을 지냈고, 휘 광수(光守)는 호가 운림(雲林)으로 역학(易學)에 정통하였으며 음보로 예빈 시정(禮賓寺正)을 지냈으며, 휘 문상(文尙)은 진사(進士)이다. 이상 선대의 분묘는 모두 광산의 석지(石地) · 황계(黃鷄) · 천곡(泉谷) · 상대곡(上大谷) ·하대곡(下大谷) ·화산(花山) ·수박(水璞) ·난봉(卵峰) 등지에 대대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어찌하여 흩어져 있어 거리도 멀고 세월도 멀어 성묘를 오랫동안 아니하니 점점 분묘 자취 가 없어지고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영화와 사례가 수가 있어서 후손이 선조를 외롭 게하는 것임을 이로써 알 것이다. 영남(嶺南) 진주(晋州)의 사인(士人) 탁유협(卓有協)등이 그 후손으로서 분묘를 실전한 것에 강개하여 문헌에 증거하고 산의 그림을 그려 오랫동안 조사한 끝에 이제야 겨우 찾아 본주에 글을 올렸는데 분묘를 수호하기 위해 뜻을 세운 말이 있다. 또 지금 사람들이 몰래 매장한 무덤을 옮기고 경계를 정하는 소송도 하였다. 관에서도 이제와 옛적을 비감하게 여 김이 깊어서 곧 장리(將吏)를 보내어 적간(摘奸)해 보니, 산의 형세와 사람들이 전해온 것 이 과연 유협(有協) 등이 말한 대로 큰 군자를 예장(禮葬)할만한 곳인데, 투장(偸葬)한 무덤 이 마치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아서 후손들의 천년 한이 되었으니 원래대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투장한 무덤을 옮기는 일과 비갈(碑碣) 등을 찾는 일은 나중에 하고, 탁씨유고(卓氏遺稿)의 어제(御製) 중에 “삼각산은 무너져도 의리는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어찌 몇 백년 뒤의 후손 유협(有協)이 있어 오늘에 부합이 되고 또 상수(相須)하는 이치가 있음 을 생각했으랴. 앞의 문제 가운데 묘지가 두명은 집안에서 말을 만한 사람을 지명하여 와서 알리니 마땅 히 차인을 보내 지키고 보호하였는데, 이는 산의 그림과 한계를 정하는 절차가 있으므로 아래에 기록하였다. 비록 시대가 바뀌고 일이 변하더라도 이에 따라 시행하고 영원히 바꾸 지 않으면 천만다행입니다.
광주겸관화순관(光州兼官和順官)
광주(光州) 적간장교(摘奸將校) 김룡채(金龍彩)
형리(刑吏) 조제원(趙悌源)
정계장교(定界將校) 정찬구(鄭燦九)

경조입안(京兆立案) -관 인증서

이 입안을 성급(成給)한 진주(晋州) 유학(幼學) 탁유협(卓有協)과 임실(任實) 유학 탁준 (卓俊) 등이 올린 소장을 보면, 우리의 시조는 고려의 태사(太師) 광산군(光山君) 문성공(文成公) 학포선생(學圃先生)이니 도학(道學)으로 고려사(高麗史)에 입전(立傳)되어 있고 이로 인하여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그 아래로 좌정승(左政承) 부원군(府院君) 충 정공(忠靖公) 대제학(大提學) 휘 도민(道敏), 부마이고 참정(參政) 광성군(光城君) 익성군 (翼成君) 휘 원광(元光), 판서(判書) 평후공(平厚公) 휘 사정(思正), 대제학(大提學) 해양군 (海陽君) 정숙공(貞肅公) 휘 종성(宗成), 평장사(平章事) 무진백(武珍伯) 소간공(昭簡公) 휘 영(英), 대제학(大提學) 문민공(文愍公) 휘 문위(文位), 판서(判書) 문정공(文正公)으로 조선 조에 들어와서 영의정을 증직받고 시호도 받은 휘 광무(光茂), 좌찬성(左贊成) 의정부사(議政副事) 문정공(文貞公) 휘 신(愼)은 호가 죽정(竹亭)이다. 죽정공은 태종이 하사한 갑계시 (甲?詩)에 “삼각산(三角山)은 무너져도 의리(義理)는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있었 으며, 세종의 사부가 되었으므로 어제(御製) 만사(輓辭)가 있을 정도로 제우(際遇)가 두터 웠고 효성과 학문이 뛰어났다. 국승(國乘)과 야사에 모든 기록이 있으며 한 시대의 명현이 되었다. 현감(縣監) 휘 희립(希立)은 23세로 일찍 죽었으며, 전적(典籍) 문충공(文忠公) 휘 중 (中)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훌륭한 벗으로서 학행(學行)과 연원(淵源)으로 세 칭 오현(五賢)이라 불리웠으며 호는 죽림(竹林)이다. 사인(舍人) 검상(檢詳)을 지낸 휘 관 (琯)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사정(禮賓寺正)을 지냈고, 휘 광수(光守)는 주역에 정통하였 으며 호는 운림(雲林)이고, 진사(進士) 휘 문상(文尙)까지 14대代의 분묘는 광주(光州)에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자손들이 타향으로 흩어져서 오랫동안 성묘를 아니 하였다. 이제야 겨우 와서 성묘를 하니 비석이 어떤 것은 남아 있고 어떤 것은 없어져서 산의 분묘들이 뒤섞였다. 그리하여 고로(故老)들에게 물어보고 읍지(邑誌)를 참고하여 하나 하나 찾아 내었다고 하였다. 재상과 명인의 분묘에 석물 비갈 등이 분명 있어야 마땅하거늘 혹 없는 것은 반 드시 투장(偸葬)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짓이다. 저등의 마음이 매우 악착같으니 후손들의 처지로는 더욱 가슴 아플 것이다. 본관에 소송을 낸 바, 아전과 장교를 보내어 살피고 산의 그림과 형세를 바탕으로 입안 (立案)을 만들어 묘지기에 책임을 맡기니 인근의 노소(老少)가 증인이 되어 문안을 만들었 다. 대개 저 경내에는 한 사람의 탁씨도 없고 모두 천리(千里)나 먼곳에 사니 뒷 생각이 참으로 전감(前鑑)의 효과를 이끌어 서울에 있는 여러 후손들이 모여 의논하여 본부에 입안을 올린다고 하였다. 대저 각 성씨의 훌륭한 조상의 분묘 중에는 혹 실전되었다가 확실한 표시가 나타나면 조 사하여 투장한 무덤을 파내고 사방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법에 있어 마땅한 것이다. 하물며 탁씨의 산에 대대로 장사지내고 관향(貫鄕)이 되며 명석(明碩) 재보(宰輔)들이 고려시대 의 혁혁한 가문이 되었고, 조선조에 와서도 탁문정공(卓文正公) 이하 효도와 학문과 제우가 당세에 탁월하여 읍지와 구전으로 명백히 전하였다. 자손들이 쇠락하여 오랫동안 성묘를 하지 않아 주민들이 방자하게 투장(偸葬)하고 비갈(碑碣)을 묻어 버려 분묘가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랄만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 만든 무덤은 파내고 옛 경계를 정하며, 영읍(營邑)은 마땅히 소송을 다루는 법률에 따라 거행할 것이며 되에 산의 그림을 붙이고 아울러 입안을 만들어 영구히 증빙문서로 삼을 것이다.

순영입안(巡營立案)

관찰사가 만든 입안은 진주(晋州) 유생 탁유협(卓有協), 전주(全州) 유생 탁기엽(卓基燁) 과 탁정순(卓正淳), 임실(任實) 유생 탁준(卓俊), 광양(光陽) 유생 탁유대(卓有大)등이 소장을 올렸다. 탁씨의 시조 광산군(光山君)은 고려 선종(宣宗)때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 호가 학포(學圃)이다. 광산을 관향으로 삼아 대대로 내려왔다. 아들은 좌정승(左政承) 대제학(大提學) 부원군(府院君) 충정공(忠靖公) 휘 도민(道敏)이고, 손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부마(駙馬) 광성군(光城君) 익성공(翼成公) 휘 원광(元光)이며, 증손(曾孫)은 판서(判書) 평후공(平厚公) 휘 사정(思正)이다. 현손(玄孫)은 대제학(大提學) 해양군(海陽君) 정숙 공(貞肅公) 휘 종성(終成)이며, 5대손은 평장사(平章事) 무진백(武珍伯) 소간공(昭簡公) 휘 영(英)이고, 6대손은 대제학(大提學) 문민공(文愍公) 휘 문위(文位)이다. 7대손은 예의판서 (禮儀判書) 문정공(文正公) 경렴선생(景濂先生) 휘 광무(光武)이니 조선조에 들어와서 예학 (禮學)을 창도하였고, 읍지(邑誌)와 입행보(入行譜)에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사림(士林)이 받 들고 백성들이 존경하고 있다. 8대손 화서는 더욱 현저하였으니 바로 죽정선생(竹亭先生) 휘 신(愼)은 벼슬이 좌찬성 (左贊成) 의정부사(議政府事)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도학과 문장으로 당시에 이름이 있었다. 태종의 계우(契遇)가 두터웠으며 또 동경(同庚)이라 첩(牒)을 내리고 증시(贈詩)에 “삼각산은 무너져도 의리는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구절이 있었다. 또 세종의 사부를 지냈는에 돌아가심에 “경이 죽은 뒤에 누가 알아 주겠는가.”라는 만시(輓詩)를 내려 주셨다. 공의 자(子) 휘 희립(希立)은 현감(縣監)으로 일찍 죽었고, 손(孫) 죽림선생(竹林先生) 휘 중 (中), 점필재(?畢齋) 등과 함께 벗하여 도학으로 서로 높여 세상에서 오현으로 칭하였고 전적으로 치사하여 이조판서(李曹判書)를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손은 사 인(舍人) 휘 관(琯)이고, 현손(玄孫)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정(禮賓正)을 지낸 휘 광수 (光守)이다. 이상 13대의 분묘(墳墓) 및 방선조(傍先祖) 판윤(判尹) 재보(宰輔)의 분묘가 모두 광주 (光州)의 여러 곳에 있다. 그 후 자손들이 각 도의 먼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아울러 향화(香火)도 없어지고 오랫동안 성묘도 아니하자, 주민들이 비석들을 숨기고 투장(偸葬)을 하며 혹 계단을 무너뜨리고 봉수(封樹)를 모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가승(家乘)을 참고하고 읍지를 조사하여 하나 하나 증거하고 찾으니, 촌로들의 설명과 유림들이 증거가 엄정함이 이와 같았다. 곧바로 본관(本官)에 입지(立旨)를 올리고 뒤에 겸관에게 드려서 아전과 장교를 보낸 산의 형세를 그리고 경계를 정하여 입안절목(立案節目)을 만들었다. 서울에 있는 여러 종인들도 경조입안(京兆立案)을 만들어 와서 영문(營門)에 소송을 하고 입안절목을 만들어 너무 가까이에 투장한 무덤은 파서 옮기려 했다. 대저 명신(名臣) 석보(碩輔)를 예장(禮葬)한 곳은 비록 후손들이 잔미(殘微)하고 멀리 흩 어져 살아 오랫동안 성묘를 아니하여 잘 지키지 못하였더라도 촌로(村老)나 아이들이 모두 탁씨의 세장지(世葬地)인 것을 아는데 방자하게 비석을 감추고 용뇌를 파헤치며 마음대로 나무를 없앴으니 매우 놀랄 일이거니와 하물며 지금 6~7인의 진신(搢紳)이 조정에 있으니 후손들이 잔미하다하여 멸시하지 못할 것이며, 수십세 재상이 모두 훌륭한 자취를 가지고 있으므로 후손이 잔미하다하여 법을 무시하고 투장하지 못할 것이다. 본관이 엄히 다스리 고 투장 옮기는 것을 독촉하며, 수호절목(守護節目)을 본부 입안에 따라 시행하고 나중에 차차 입안을 할 것이다.

절목(節目)-규칙의 항목

一. 광산 탁씨는 대대로 벼슬한 고가(古家)로 번창하고 쇠퇴함이 있어서 묘소를 잃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찾게 되었는데, 사람의 자손으로서 선조의 땅을 추모함에 누가 이를 공 경하지 않겠는가.
一. 탁씨의 산소를 지금 찾았으니 무덤 지키는 이 1명과 묘지기 1명을 관에서 특별히 파견 하여 지키고 만약 잘 시행되지 않으면 엄히 다스리며 고쳐 정한다.
一. 대신의 분묘는 사산(四山)에 금양(禁養)함이 법전에 있으니 탁씨의 금양(禁養)도 반드 시 사산(四山)의 경계가 있을터, 산의 그림에 보면 많은 무덤이 있으니, 이는 모두 탁 씨가 실전(失傳)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 투장한 것이다. 본손이 이미 이를 밝혔고 투장 한 사람도 이를 옮기겠다고 했으니 탁씨의 사산금양(四山禁養)은 마땅히 옛 일처럼 할 것이다.
一. 석지(石地) . 황계(黃鷄) . 천곡(泉谷) . 흑석(黑石) .검악산(劍岳山) . 상대곡(上大谷) . 하대곡(下大谷) . 태곡(太谷) . 화산(花山) 등지의 탁씨 금양(禁養) 구역내에 만일 사족 으로 주장한 일이 있거나 상민이 투장한 일이 있으면, 이는 봄이 오기를 기다려 다시 문서를 올려 차례로 옮겨 간다.
一. 탁씨의 사산금양(四山禁養)은 아전과 장교로 하여금 이미 살피게 하고 경계를 정하였으니 이후에 장사하는 사람은 그 땅으로 일을 시끄럽지 말게 하라.
一. 사산(四山)은 이제 본주에 돌아 왔으니 이미 자란 소나무 등과 땔감등은 모두 탁씨의 소유이다. 먼저 투장한 무덤의 주인에서 산밑에 사는 주민들에 이르기까지 만약 범하 는 자가 있으면 수총자와 묘지기는 관에 알리고 징속할 것.
一. 사산 내에 함부로 경작하는 자는 끝가지 단속하며, 면리(面吏)가 묵은 땅이 있다고 하 는 것들은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
一. 수호절목(守護節目)은 2부를 만들어 1부는 본손에게 주고 1부는 본주의 향청에 둔다.
一. 분묘를 지키는 곳에 위토답(位土畓)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본손과 자손들은 힘을 합 하고 의논을 하여 재물을 모아 땅을 사서 묘지기에게 준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참찬 (議政府參贊)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사(春秋 館事)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
세자우빈객(世子右 賓客)
증시문정(贈諡文貞)
탁공신도비명(卓公伸道 碑銘)
병서(幷序)


세종대왕 8년 병오(丙午;1426) 춘정월(春正月) 18일 계축(癸丑)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인 탁공(卓公)이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는 몹시 슬퍼하 시며 조회를 3일간 거두시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치제문(致祭文)에 이르기를 “보필 하는 어진 신하는 실로 치교를 힘써 도우며, 슬픔과 영화와 은혜로운 가르침은 언제나 갖 추어 높도다. 경은 강명한 자질을 받아서 경사(經史)의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청렴하며 지 킴이 있고, 단정하고 성실하여 외화가 없었다. 효제의 행실이 일찍이 되었으며 충근한 뜻이 더욱 돈독하였다. 대간(臺諫)을 두루 역임하여 명성이 더욱 높았다. 밝혀 상고하고 정사에 임할 때를 당하여 출납을 오래 하였으며 과인이 사복(嗣服)하는 날에는 도와주고 이끌어 줌이 많았다. 육조에 있으면 일처리가 정확하고 자세하였고, 의정부에 있으면 큰 계획을 잘 하되 곧고 믿음이 있었다. 빈객을 담당하는 중임과 춘추(春秋)를 수찬(修撰)하는 일을 맡으 니 의지하고 돕는 자가 더욱 많아서 오랫동안 건강하리라 하였더니, 어찌 병에 걸려 문득 중천을 사이하였는가. 온아한 모습을 그려보고 상심하는 마음을 이루 다할 수 없구나.” 하 였다. 왕세자도 필선(弼善) 김상직(金尙直)을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오직 혼령은 마음 잡음이 곧고 믿쁘며 행실도 겸손하고 공손하여 덕은 재상자리에 부합되고 학식은 유종(儒宗)이 되었도다. 내가 입학하여서 처음 공에게 배웠는데 강론이 분명하고 의리 가 다하여서 나의 어눌함과 어리석음을 열어 주고 깨쳐 주었다. 정녕한 가르침이요 시종여 일한 모범이었다. 거의 수를 누려서 길이 우러러하였더니 어찌 병에 문득 돌아가심을 기필 했으리오. 은의를 생각하여 보답코저하나 방법이 없어라. 박채를 차려 전을 올리니 슬프고 슬프도다. 부의를 넉넉히 하여 상사를 도우니 살아선 영화롭고 죽어선 슬퍼함이 은혜와 예의를 갖추었구나.“라고 하였다. 광주(光州)의 두촌(杜村) 왼편 언덕에 예장하였는데 나중에 교궁(校宮)을 지으니 조역(兆域)에 가까워 당부면(當夫面) 유목동(柳木洞) 검암(劍巖) 진좌(辰坐)로 옮겼다. 예법대로 마 땅히 신도비(神道碑)가 있어야 했는데 아직도 겨를치 못하였다. 공의 후손이 양(陽)이 아름다운 덕이 없어져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합종(閤宗)과 의논하여 돌을 지우고 예물을 갖추어 나에게 명(銘)을 창하였다. 나는 학식이 적고 또 병으로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 겠다고 고사(固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기록릉 살피고 국승(國乘)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문을 지었다. 공의 휘는 신(愼) 자는 계위(係危)이고 죽정(竹亭)은 호(號)이다. 시조는 고려 태사 (太師) 지엽(之葉)이니 공으로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이를 따라 관향을 삼았다. 이로부터 벼슬이 계속 이어지고 가문이 번창하였다. 오전(五傳)하여 휘 종성(宗成)은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으로 시호는 정숙(貞肅)이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 (曾祖)의 휘는 영(英)이니 평장사(平章事) 무진백(武珍伯)으로 시호는 소간(昭簡)이며, 조 (組)의 휘는 문위(文位)이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으로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아버지의 휘는 광무(光茂)이니 호는 경렴정(景濂亭)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판종부시사(判宗簿侍事) 문의(文義) 박지연(朴之衍)은 외왕부 (外王父)이다. 공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정미년(丁未年;1367년) 9월 13일 태어났으며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1389)에 사마(司馬) .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삼각산(三角山)에 은거하였다. 정종이 등극하여 유일(遺逸)을 구하자 조정이 효행으로 서로 공을 추천하니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는데 얼마 뒤에 부모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태종이 잠저 시절에 동경(同庚) 20인과 계를 하였는데 어제(御製) 칠언시(七言詩)로 사랑하였으니 공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권우(眷遇)가 특별하였으며 수선(受禪)한 뒤에 용담현 령(龍潭懸令)을 제수하뎠다. 갑신년(甲申年;1404)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고 옮겨서 사헌 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조금있다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평양군(平壤君) 조대림 (趙大臨)이 명(命)을 속여 군사 동원한것을 탄핵하고 중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겨우 허락하였다. 이에 공이 직언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나주(羅州)로 장류(杖流)되었다. 조금있다가 돌아와서 전농정(典農正)을 제수받고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승정 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되었다. 이 때에 정종을 환영하는 연회를 대궐 안에서 열었는에, 임금이 시를 짓고 공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임금이 손수 공의 모자에 꽃을 꽂 으며 말하기를 “충성은 사람마다 같지 않으리라,” 하였다. 을미년(乙未年;1415년)에 좌대언(左大言)으로 승진하여 병비육사(兵備六事)를 올?홱쨉?말이 모두 시의에 맞아 임금이 가납하였다. 병신년(丙申年;1416년)에 권완(權緩) 유사눌 (柳思訥) 등이 죄를 지었는데 공이 또한 연루되었다. 임금이 공의 무죄함을 살피고 특별히 지신사(知申事)를 제수하였다. 이에 법사(法司)가 탄핵 침내 물러났다. 오래 되에 임 금이 좌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탁신은 언제나 백성의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 제 오랫동안 민간의 일을 듣지 못했다.“ 하고 공을 불러 경승부윤(敬承府尹)에 제수하고 이 조참판(吏曹參判)으로 옮겼다가 세자 우빈객(右賓客)을 거쳐서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년)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어 민생의 괴로 움을 풀었다. 동지경연(同知經筵)으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전하께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밤이 깊어야 주무신다고 하시니, 원컨대 전하는 이 마음을 잡으시어 게으르지 마십시오. 인심은 무상하여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니 정사를 보고 학문하는 외에 다른 생각을 갖지 않으면 총명이 날로 넓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하루는 임금이 묻기를 “오늘날 조정에 어떤 일이 가장 급무냐.” 하였다. 윤집(尹집)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보장(保障)을 위한 성쌓는 일이 급합니다.” 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보장이 비록 국가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인심이 바르면 백가지 일이 잘되고, 바르지 않으면 만 가지 일이 나쁘게 됩니다. 이제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시니 시서(詩書)를 공부하고 치도(治道)를 강명하는 것을 목하의 급무로 삼으십시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을 좌우명 으로 삼으리라.“ 하였다. 임인년(壬寅年;1422)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예문관제학(禮文館提學)이 되고 연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리니 공이 고사(固辭)하였지만 윤허하지않았다. 대게 공은 염정자수(恬靜自守)하고 학문이 정미하여 임금께서 그 어짐을 아시고 의지하고 협찬(協贊) 하였고 도움이 되는 바가 넓고 많았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임금이 거울을 잃어버린 슬픔을 가지셨다. 태상에 명하여 시법을 상고하니 부지런히 배우고 잘 물음과 청백하여 절조를 지 킨다는 것으로 문정(文貞)이라 시호 내렸다. 배(配)는 안성 이씨(安城李氏)로 현령(縣令) 손(孫)의 딸인데 공의 묘 왼쪽 진좌(辰坐)에 장사지냈다. 계배(繼配) 광주정씨(鄭氏)는 감찰(鑑察) 린진(麟晋)의 딸인데 송정리(松亭里) 유좌(酉坐)에 장사지냈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정부인(鄭夫人)은 이 남이녀(二男二女)를 낳았다. 큰 아들은 희립(希立)이니 음보로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 고, 둘째 아들은 사립(斯立)이니 음보로 영암군수(靈岩郡守)를 지냈는데 출계하였다. 정효 충(鄭孝忠)과 송반(宋盤)은 사위이다. 현감(縣監)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 중(中)은 문과에 합격하고 전적(典籍)으로 치 사(致仕)하여 이조판서(李曹判書)를 증직받았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둘째 아들 평(平) 은 진사(進士)이다. 형제가 보두 김강호(金江湖) 숙자(淑姿)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점필재 (??齋)과는 도의로 사귀었다. 중(中)의 아들 관(琯)은 문과에 합격하고 사인(舍人)이며, 련(璉)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인데 일에 연좌되어 정주(汀洲)로 유배갔다가 그곳에 정착 하였다. 평(平)은 련(蓮)으로 후사를 삼았다. 공은 천성이 지극한 효성이라 부모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 갖추어서 병이 들면 그 근심을 다하였고, 돌아가시면 그 슬픔을 다하였다. 상제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으며 늘 문정공가법(文正公家法)을 지켰다. 경학(經學)에 종사하여 아침 저녁으로 힘써 공부하였으며, 음율(音律)과 무예(武藝)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을 가 르칠 때는 반드시 소학을 먼저하여 법도가 엄숙하였고, 평생 재물의 이익을 탐하지 않아 문정(門庭)이 궁핍하였으니 가히 유림의 표준이요 시대를 밝히는 큰 선비라 한 것이다. 아 슬프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명(銘)에 이르기를
예조(藝組)가 용흥(龍興)하여 방가(邦家)를 세우고
신성(神聖)이 서로 이어 덕이 공훈을 짝하네.
이에신 신이 때를 맞춰 나오니
풍운이 가까이 모여들 듯하네.
태종(太宗)과 동경(同庚)이라.
일찍이 총애를 받았도다.
세종(世宗)의 스승이 되어
휴광(休光)을 더하였네.
낭묘(廊廟)에 나가서는
전모(典謨)를 도왔으며,
큰 터전은 공고히
길이 도모할 것을 생각했네.
임금이 가하다 말하고
심복으로 맡겼더니
안위(安危)가 매인 바라
정려(鼎呂)보다 중히 했네.
갑자기 기기(騎箕)하니
임금의 마음이 더욱 슬퍼,
은혜로운 말로 유식하고
훌륭한 업적을 높였네.
높은 저 검암(劍巖)에
특멸히 정민(貞珉)을 세우고
큰 글자로 깊이 새겨
천년을 길이 빛내리.

신사(辛巳) 1941년 12월 일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비서원승(前秘書院丞) 안동(安東) 김영한(金?漢) 찬(撰)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이조판서(李曹判書)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 여흥(餘興) 민병승(閔炳承) 서 병 전(書幷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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