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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령견(堅)
견권(堅權)
시조 견권은 왕건 (王建)이 후백제(後百濟) 신검을 토벌할 때 대상으로 출정하여 후백제(後百濟)를 멸망하게 하는 전공(戰功)을 세운 고려개국 2등 공신(開國二等功臣)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여 본관을 천녕 이라하였다.
본관은 천녕(川寧:驪州) 단본이나, 문헌상으로는 사량(沙梁:水原)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도 전한다.시조는 견권(堅權)으로, 그는 왕건(王建)의 휘하 장군으로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고, 936년(태조 19)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과 마지막 결전을 할 때 대상(大相)으로서 좌익(左翼)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총 47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24가구는 황해도에서, 나머지는 주로 경상도에서 살았다. 1975년도 조사에서는 249성 중 194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99가구 452명으로 274성 중 181위였다.
천녕은 경기 여주군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으로 , 여주(驪州)는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여주군은 상고시대부터 여러 부족이 산재하여 대신면 천서리(川西里)의 파사성(婆娑城)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라는 전설이 있다.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구려 영토가 되어 장수왕(長壽王) 63년에 골내근현(骨內斤縣)이라 이름한 것이 여주 최초의 지명이다. 신라가 백제를 멸한 후에는 현 금사면(金沙面)에 술천성을 쌓고 고구려 축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이 된 후 1018년(현종 9)에 강원 원주에 영속되었다가 1214년(고종 1)에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1305년(충렬왕 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한 후 1401년(조선 태종 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에서 경기로 변경되었다. 1414년(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고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현 능서면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 여주목(驪州牧)으로 하고 목사(牧使)를 주재시켰다.

1501년(연산군 7)에 여주목의 관할구역을 없애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5년 충주부 여주군으로 칭하였다. 1914년 부 · 군 · 면 폐합 때 경기 여주군이 되어 1개읍 9면을 관장하였다. 1963년 개군면(介軍面)을 양평군으로 편입시키고, 1970년 금사면 산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9년 금사면의 산북출장소(山北出張所)를 산북면(山北面)으로 승격시켰으며, 1992년 북내면 오학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94년 강천면 대둔리가 강원도 원주시로 편입되었다.

1999년 현재 여주읍 · 점동면 (占東面) · 가남면 (加南面) · 능서면 (陵西面) · 흥천면 (興川面) · 금사면 · 대신면 (大神面) · 북내면 (北內面) · 강천면 (康川面) · 산북면 (山北面)의 1개읍 9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견 (堅) 씨는 153 가구에 519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98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경주 일원 . 황해도 장연 일원.
견씨의 본관은 천녕 (川寧:지금의 경기도 동부지방 여주의 옛이름)으로 전래되고 있으나 해주 하나밖에 없는 단일본이다.

해주견씨는 황해도 해주에 100여세대를 비롯하여 경북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에 8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라말기에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쓴 ‘ 한국금석유문 (韓國金石遺文) ' 에 보면 견상 (堅相)의 행적은 없으나 ‘ 부거불 (副居弗) ' 이라고 적고 있으니 승 (僧)의 다음 가는 계층에서 영향력을 가진 분으로 해석되고 있으니 견씨도 중국의 고대(古代) 성씨로 추리할 수 있다.

견씨의 시조는 고려태종(918)때 재상(大相)벼슬을 지낸 견권으로 역사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본래 왕권의 휘하장군으로 궁예란(弓裔亂)을 진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개국2등공신에 올랐다. 고려개국에 혁혁한 수훈을 세우고 왕건 태조가 후백제를 멸망시킨 마지막 결전(936년) 때 주장 왕건의 좌익으로 참전하는 등 공이 컸었다.

견금은 고려때 병부경대시랑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청주 영군장군으로 많은 수훈을 세웠다고 사서에 기록돼있다. 해주 견씨를 중흥시킨 분은 견금이 중흥조라 할 수 있다. 견선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제하여 병마정남대장으로 승진하여 임금으로부터 옥대를 하사받았다. 견일은 고려때 시중복야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현종1년(1010년)에 거란족이 흥화진(강동 6주의 하나로서 평양부근에 위치)을 침입했을 때 홍광장군과 더불어 9일동안 거란족을 몰아내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견서는 현종때 문과에 급재하여 평장사(재상급에 해당하는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옥간금포를 하사받았다.

견유는 고려때 정서대도부의 벼슬을 지냈다. 견경의 호는 충와요, 판도판서의 벼슬에 오르고 많은 치적을 쌓았다. 견림의 호는 지옹이요, 선공감봉사의 벼슬에 올랐다. 견호의 호는 금암이요, 부사의 벼슬에 오르고 충효란 두글자를 임금으로부터 사서(賜書)받았다. 견창은 고려때 병절교위(병절교위)의 벼슬에 올랐으며 나이 19세때 행적으로 보면 족보 계대에 모호하여 상고할 수가 없어 학계의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해주 견씨 족보에 나타난 기록을 보자.

해주 견씨의 중시조는 조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신령현감의 벼슬을 지냈다. 견석주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에서 중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한학에 수학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여모 3년을 끝내고 고을에서 천거하여 참봉벼슬에 오르고 노후에는 후진 양성에 정진하였다.

그의 묘소는 부모님의 산록하에 자리하여 사후에도 효심을 생각해서 안장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견세공은 주부직장 벼슬을 지내고 견웅기는 훈도를 지냈다.

견응기의 아들인 견천지(堅川至)의 호는 송고요, 명종 19년(1564)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의젓하여 보통애들과 다르더니 자라서는 집에 들어앉아 학문에 힘쓰고 명리를 바라지 않았다. 또 성력(星歷)과 병서에도 통달했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임진왜란(1592년)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으며, 정유재란중이던 선조 30년(1597년) 12월22일 34세의 나이로 장열히 전사했다. 그는 의병을 모아 동계 이언춘(李彦春:양무공)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경북 영천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뒤 선조대왕이 그의 전공을 인정하여 중직(죽은 뒤에 내르는 직) 병조참판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유택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 동추산록 기슭에 모셔졌다. 그는 도산싸움에 출전하여 선두에서 싸우다가 적의 총에 맞아 군중에서 숨졌다. 그가 전사하자 명나라 장수가 칼을 빼어 땅을 치면서 ‘ 이 나라가 이러한 간성을 잃는구나 ' 하며 애통해 했다 .

견천지는 죽을 때 군교에게 “ 내가 죽거던 전열앞의 말위에 나를 태워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라 ” 고 말했다 . 군교들이 그의 말대로 죽은 그를 말위에 태워 북을 울리며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것같이 했더니 왜군들이 바라보고는 도주하여 그 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려진 역사속에 남아있다.

해주 견씨의 중요인물을 보면 고려때 견권, 견금 병부경태평시랑, 견서 병마정남대장, 견일 시중복야, 견서 평장사, 견유 대도부, 견경 판도판서 등을 배출하였다. 해주 견씨 종친회 고문 견학필, 견진봉, 회장 견태화, 부회장 견진원, 사무국장 견정필씨 등이 중심이 되어 위선(爲先)에 정진하고 있으며 영남의 명문에 버금가는 충효가문으로 명성이 높다.

종친회 (0561)749-8435 견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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