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이며, 당(唐)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하여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조가 되었다.
본관은 8본이 전하나, 김포(金浦) · 문천 (文川)을 제외한 6본은 자세하지 않다.
755년(경덕왕 14)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예인 공윤보(公允輔)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김포에 정착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김포공씨는 윤보의 후손으로 조선 성종 때 계공랑(啓功郞)을 지낸 명례(明禮)가 시조이며, 문천공씨는 같은 윤보의 후손으로 세종 때 함남 문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한 보언(普彦)이 시조이다.
김포는 경기도 서쪽 ,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김포(金浦)는 옛 김포군과 양천군이 합병되어 이루어진 시이다. 고구려 때 김포는 검포현, 양천은 제차파의현이라 하였다. 검포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쳐져 장제군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분리되어 명종(明宗) 때 감무를 두었으며, 1198년(신종 1)에 이르러 현령을 두었다. 1414년(조선 태종 14)에 양천(陽川)을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고, 나중에 다시 양천은 금천에, 김포는 부평부에 합하였다가 16년에는 다시 현으로 복귀시키고 현령을 두었다.
한편 제차파의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으로 고쳐져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1018년에 수주에 속하였다. 그 후 1310년(충선왕 2) 다시 양천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 양천현은 김포현에 합하여졌고, 나중에 금천에 합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현으로 복귀시켜 현령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김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양천현을 흡수하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서 · 양동 2개면이 서울에 편입되어 7개면이 되었다. 1974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천군의 오정면과 계양면이 김포군에 편입되어 9개면이 되었으나, 그후 1975년 9월 23일에 오정면이 부천시로 이속되어 8개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김포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검단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같은 해 3월 검단읍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면서 1읍 6면이 되었다.
1998년 4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포군이 시로 승격되었고, 김포읍을 폐지하여 김포 1 · 2 · 3동을 두었다. 2000년 현재 행정구역은 6면 3동을 이룬다.
대표적 인물로는 , 조선 중종 때 성균관전적(典籍)을 지내고 시문(詩文)에 능한 규(珪)가 있다.
벽동파 (碧潼派) ·
문천파(文川派) ·
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437가구로서 성별순위 제119위를 차지하였는데, 이 중 353가구가 평북 벽동군에 집중 거주하고 남한에는 10여 가구만 살았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 359명으로 순위가 258성 중 제159위로 떨어져 대다수가 북한에 거주함을 보여주었고, 85년 조사에서는 420가구로 274성 중 제146위였다.
김포 공(公)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521 가구에 1,71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957 위이며, 공(公) 씨는 741 가구에 2,442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50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