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궁흠 (弓欽)은 중국 태원사람으로서 기자가 우리나라에 올때 태사로 수행해와서 도의교육에 힘써 토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후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후손인 계신을 1세조로하여 본관을 토산으로 하였다.
궁씨 (弓氏)는 본래 중국(中國) 태원(太原:지금의 산서성 기령도에 속한 지명) 숙궁(叔弓)의 후손(後孫)이 이름자(字)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궁씨(弓氏)는 태원(太原) 출신인 궁 흠(弓 欽)이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토산에 세거(世居)한 것이 시원(始源)이 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궁씨(弓氏)의 본관(本貫)을 토산(兎山)과 순천(順川)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토산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토산은 황해도 (黃海道)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이 토산(兎山)으로 고쳤다. 서기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에 속했다가 1062년(문종 16) 개성(開城)의 직할시가 되고, 예종(睿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어 황해도(黃海道)에 이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일부는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8 · 15광복 후 신설된 군으로서, 광복 당시에는 황해도 금천군에 속하였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금천군의 동부인 외류면 · 서천면 · 합탄면 · 구이면 · 화면 · 토산면이 분리되어 토산군이 신설되었다 . 54년 10월 황해남 · 북도가 신설되면서 황북으로 편입되었다 . 현재의 행정구역은 토산읍과 양사 · 용암 · 월성 · 북포 · 안봉 · 황강 · 매봉 · 하남 · 봉불 · 수합 · 합탄 · 문성 · 미당 · 송세 · 백화 · 송천 · 석봉 등 17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달초 (達楚) · 억로 (億魯) · 현섭 (顯燮) · 인성 (寅聖) 등이 있는데, 특히 평남 순천(順川) 출신의 인성은 독립단 평남도지단장으로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고,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당시 350가구 중 80 %에 가까운 269가구가 평남 순천과 개천(价川) 등지에 살았고, 남한지역에는 겨우 10가구 안팎이 살았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궁씨 인구는 300여 명이고,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64위였으며, 85년도 조사에서는 총 134가구로 249성 중 제177위였다.
궁(弓)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83 가구에 562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95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