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씨의 시조는 기자조선 [箕子朝鮮]의 시조왕 기자[箕子]의 48대손인 기우성[寄友誠]으로 전한다. 행주기씨대동보에 의하면 우성은 백제에서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그후 계보가 실전되어 고려때 문하평장사를 역임한 후손 순우[純祐]를 1세조로 하고 행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기씨 (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기씨(奇氏),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행주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고려시대 행정구역으로 . 백제의 개백현(皆伯縣)이었는데, 475년(문주왕 즉위) 고구려가 점령하여 왕봉(王逢)으로 고쳤다. 삼국통일 뒤 757년(경덕왕 16)에 우왕현(遇王縣)으로 바꾸어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 940년(태조 23) 행주현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양주(楊州)에 귀속시켰다. 조선의 건국으로 1394년(태조 3) 고봉현(高烽縣)에 통합되었고, 1914년 고양군 지도면(知道面), 1985년 지도읍이 되었으나 1992년 고양군이 고양시로 개편됨에 따라 그 중심지역은 행주동으로 남게 되었다.
고양시는 고구려 때는 달을성현(達乙省縣), 신라시대에는 고봉현(高峰縣)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고봉 · 덕양 · 부원 · 황조현을 합쳐 덕양현 (德陽縣)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1394년(태조 3) 처음으로 감무를 고봉에 두어 3현을 다스렸으며, 1403년(태종 3) 고봉 · 덕양을 합쳐 고양현으로 개칭하고 1470년(성종 1)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군을 폐하고 유행처(遊行處)로 만들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경성부로부터 8개면, 양주군으로부터 1개면이 편입되었다가 1936년 4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용강(龍江) · 연희 (延禧) · 한지 (漢芝)의 3개면이 경성부에 편입됨으로써 9개면이 되었다. 1949년 다시 은평(恩平) · 숭인 (崇仁) · 뚝섬의 3개 면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6개 면이 되었으며, 1967년 화전(花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신도면(神道面)의 구파발 · 진관내 · 진관외리의 3개 리가 서울시에 편입되고, 그 해 7월 신도면이 신도읍으로 승격하였다. 1979년 5월 원당면이 원당읍으로, 1980년 벽제면이 벽제읍, 중면(中面)이 일산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5년 지도면이 지도읍, 신도읍 화전출장소가 화전읍으로 승격하여 6읍 1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일산을 비롯한 7개 지역에 신도시 및 택지개발사업이 추진되어 1992년 2월 군 전역이 시로 승격하였다. 1993년 주엽동 신설, 1996년 덕양구와 일산구가 설치되었다. 덕양구는 구청이 화정동 965번지에 있으며, 주교동, 원신동, 홍도동, 성사1 · 2동, 효자동, 신도동, 창릉동, 고양동, 관산동, 능곡동, 화정1 · 2동, 행주동, 행신1 · 2동, 화전동, 대덕동 등 18개 동이 있다.
일산구는 구청이 마두동 815번지에 있으며, 식사동, 일산1 · 2 · 3 · 4동, 풍산동, 백석동, 마두1 · 2동, 주엽1 · 2동, 대화동, 장항1 · 2동, 고봉동, 송포동, 송산동 등 17개 동이 있다.
2000년 현재 덕양구와 일산구 2구와 35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인물로는 순우의 아들 수전 [守全]이 문하평장사를, 손자 윤위[允偉]는 상장군을,
윤숙[允肅]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탁성[탁성]이 1174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최고벼슬인 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조선때의 성리학자 기대승[기대승]이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는데.
후일에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행주 기 (奇)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6,660 가구에 21,536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231 위이며, 기(奇) 씨는 7,541 가구에 24,385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81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