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씨는 원래 개성 왕씨로 고려의 왕족
이었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며 왕씨가 멸족을 당하게 되자 공민왕
(고려 31대)때의 재상이었던 왕씨 한사람이 살기위해거 도망을 하던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포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당황하여 '네?' 하고
반문하자 포졸이 내씨로 기록을 하여 내씨가 되었으며 본관은 원래 왕씨의 본관인
개성으로 하였다. 노일전쟁때 이름을 날렸던 내목대장도 왕씨(내씨)의 망명족이라고
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내씨 (乃氏)의 선계(先系)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사강목(東史綱目)」 에 신라(新羅) 소지왕(炤知王 : 제 21 대 왕,
재위기간 : 479 - 500)의 비(妃)인 선혜부인(善兮夫人)이 이벌찬(伊伐飡)의
내 숙(乃 宿)의 딸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충혜왕(忠惠王 : 제 28대 왕, 재위기간 : 1330 - 1332, 1339 - 1344)의 사부(師傅
: 고려 때 세자와 세손에
게 학문을 가르치던 정1품 품계)가 내 원(乃 圓)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된 씨족(氏族)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내씨(乃氏)와의 관계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내씨(乃氏)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 왕씨(高麗王氏) 일족을 숙청(肅淸)할 때 화(禍)를 면하기 위하여 내씨(乃氏)로 변성(變姓)하고 관향(貫鄕)을 개성(開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병란(兵亂) 등으로 보첩(譜牒)과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여 조선(朝鮮) 현종 조(顯宗朝)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내득균(乃得均 : 일명 득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개성 (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 · 송도 , · 개경 , · 부소갑 , · 동비홀 , · 촉막군 등으로 불리었다 . 919년 개성과 송악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그후로도 황도, 개성부, 개성군, 개성씨 로 변천되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1세조 득균의 아들 용익(鎔翊)이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장호(章澔)는
영조때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슬하에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賢達)하여 개성내씨의 3 대산맥을 이루었다.
개성내씨는 장호의 아들 3 형제 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장남 정원(楨元) 은 선조의 대를 이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차남 정빈(楨彬)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여, 통정대부에 오른막내 정성(楨成)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외 인물로 용익의 증손 홍섭(弘燮) · 경섭 (慶燮) · 몽섭 (夢燮)이 모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선략장군에 오른 재욱(在郁) · 재한 (在漢) · 재렴 (在廉)등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학륜(學崙)과
함께 명성을 떨쳤 다. 근래에 와서 개성 내씨는 1988년 4월 5일에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리에 위치한 1세조의 묘역을 단장하고 묘비를 건립하였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남 천원, 황해도 봉산, 함북 청진 등지에
85가구 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1 가구,
30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