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씨 (馬氏)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에서
발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로서 마한의 첫 군주인
마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에는 백제 건국공신으로 좌보의 벼슬을 역임한 마려(馬黎)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수 없으므로 [마육침]을1일세조로 하여 계보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인문이 이끄는 13만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군사를 일으켜 옛 목지국의 성거산(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을 도모했던 장군이다.
마씨 (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
主)인 마 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때의 사람인 마려(馬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본관은 목천(木川) · 장흥 (長興) 두 본이나, 장홍마씨는 목천마씨의 시조
마점중(馬占中)의 둘째아들 혁인(赫仁)이 옛 선조의 관향에 옮겨와 살게 됨으로써 분적된 지파(支派)이다.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때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영암(靈岩)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 1265년(인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장흥부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1914년 부 · 군 · 면 폐합에 따라 웅치 (熊峙) · 회천
(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 · 남하 (南下) 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목성군에 봉해졌으며,그의 맏아들 현(鉉)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목천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을 신라 경덕왕이 대록군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목주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때 목천으로 개칭하였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때
목안군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때 홍주목사로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때
평장사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를 지낸
지백(智伯)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관산군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후학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 당상촌으로 이거하였고, 만년에 수령군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난 때 방원을 도와 좌명삼등공신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전라도
병마절제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1419년 북방육진 개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을 완축하는데 공을세워 장흥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폭군 연산군의 불의와 패륜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윤(倫),응훈(應勳),운종(蕓宗),
온종[溫宗], 창종(昌宗) 5종형제가 모두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의 가통을 지켰다
장흥마씨의 중시조인 마천목 (馬天牧)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마승(馬勝)의 문간공파(文簡公派), 마전(馬
)의 조은공파(釣隱公派), 마반(馬 )의 현감공파(縣監公派), 마춘(馬椿)의
참판공파(參判公派)의 4파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