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서현 ( 西縣:감숙성 난산도)에서
계출된 성씨로 성인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 손(閔 損:자는 자건,
노나라 현인)의 후손이며,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였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을 비롯하여 황려 (黃驪)
· 영주 (榮州) · 여주 (驪州) · 대전 (大田) · 해남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흥 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여흥은 경기도 위치한 여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골내근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효현으로, 고려 초에 황려현, 고종때 영의(永義)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때 여흥부로, 예종조에 여주목으로 하고 1914년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서부터 명문의 지위를 굳혀
온 민씨는 시조의 증손 영모 (令謨)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내고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으먀,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고, 신종조(神宗朝)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오른 아들 식(湜)과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 소보(太子小保)를
지낸 공규(公珪) 형제를 낳아 가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두르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후손에서 그의 증손 지(漬)가 충렬왕과 충선왕조에 걸쳐 원라라와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충숙왕 때 수정승(守政丞)으로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이 탁월하여「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했고, 아들 상정(祥正)과 상백(祥伯)이 뛰어났다.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한 상정(祥正)은 충숙왕 때 장령(掌令)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조선 개국에 반기를 들었던 안부(安富)는 상서공(尙書公) 식(湜)의 6세손으로
두문동에 은거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고, 상정(祥正)의 손자 여익(汝翼:도평의사 현의 아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
3등공신에 올랐으며 태종 때 공조판서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세종조에 호조 판서로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한편 여흥군 지(漬)의 증손 안인(安仁:찬성사 선의 아들)은 공민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조선이 개국된 후 왕명으로 악기(樂器)를
정리하고 제도를 바로잡아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며 그의 아우 유의(由誼)는 판서(判書)를 지냈다.태자 소보(太子小保) 공규(公珪)의 증손
종유(宗儒)는 충렬왕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충혜왕 때 대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使)를 지냈으며
전고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으로 여평군(驪平君)에 봉해졌던 적(종유의 아들)의 아들 사평은 일찍이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참리가
되었으며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뛰어나 당대의 학자였던 이제현(李齊賢) · 정자후 (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특히 조선 초기에 가문을
드러낸 인물로는 여평군 적의 손자 제(霽:여원군 변의 아들)와 개(開)의 형제가 두드러진다.
공민왕 때 19세로 문과에 올랐던 제는 창왕 대 예문관 제학과 예조판서에 이러 한양부윤을 역임했고, 조선 태조 때 정당문학이 되어 여흥백에
봉해졌으며 태종의 국구로 잡신을 섬기는 음사를 지극히 미워하여 그가 거처하는 관청이나 집의 벽에는 화공을 시켜 몽둥이를 든 하인과 개가 무당과
중을 쫓는 모양의 그름을 그리게 하여 붙여 두었다고 한다.또한 그는 사치와 오만을 배격하고 건강 양성에 힘을 쏟아 병자에게 약을 주는 방을
전국에 보내 보건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그의 관념으로 슬하의 아들 이름을 무구(참지승추부사 · 여강군 ) · 무질 (우군도총제 · 여성군 ) · 무휼 (한성윤) · 무회
(예문관 제학 · 여산군 ) 등으로 지었다.변의 막내아들 개(開)는 공양왕 때 한성부윤과 대사헌을 지내고 정도전 일파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피살 직전에 방원의 저지로 위기를 넘겼으며 그의 둘째 아들 불탐이 세종 때 등과하여 경상도 감사와 이조 참판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명성을 얻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음모에 완강히 거절했던 신(개의 손자, 불해의 아들)은 계유정난 때 현릉에 비를 세우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인 삼군진무 서 조에 의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무참히 참살당했다.대제학 유의 7세손 제인(사간 수의 손자, 전적 귀손의 아들)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인종 때 위사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명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밀지를 내려 인종의 장인 윤 임과 류인숙 · 류 관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윤 임 일파의
처벌은 마땅하나 평지풍파를 일으켜 민심을 동요시키지 말 것을 건의했다 .명종과 선조대의 명신 기(현령 세류의 아들)은 여흥 민씨의 중흥 인물이다.
다섯의 나이로 천자문을 배울 때 진(晋) · 초 (楚) 두 글자를 익힐 무렵 아버지에게 묻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있기 전에는 이
글자의 뜻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하여 아버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명종조에 좌의정 윤 개가 정치를 자기 주장대로 하는 독재성 때문에 조정이 모두 그를 싫어했을 때 기는 윤 개의 면전에서 "거만한
용이 후회함이 있다"라고 충고했으며 후에 윤 개가 왕의 미움을 받아 "대신에 합당치 않다"는 전교를 내렸을 때
기는 "대신을 예로써 대우해야 하며, 간하는 신하의 말을 받아들여 용납해야 합니다."하며 본인 앞에서는 대담하게 충고하고
또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제하는 데 힘써 그의 훌륭한 인격으로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역리(易理)를 공부했던 순(純:대제학 유의 6대손)은 주정설(主靜說)을 생활을 철학으로 삼아 개성있는
일생을 살았으며 제인(齊仁)의 현손 광훈(光勳)은 아들 정중(鼎重), 손자 진장(鎭長)과 함께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장원했던 광훈은 정언과 지평을 거쳐 홍문관 교리와 사간을 지낸 후 효종 때 승지에 오르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시중은 현종 때 대사헌을 역임하고 형조 참판으로 치사했으며 충후한 인품과 학행으로 유명했다.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정중(鼎重)은 인조 때 장원으로 등과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한 후 참찬의정부사를 지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의 득세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경신대출적으로 풀려나와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노론(서인)의 증진으로 경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사림의 명망이 높았던 유중은 영돈령부사로 여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흥의 연곡서원과
벽동의 구봉서원에 제향되었고, 그의 딸이 남인과 서인의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비의 비운을 겪었던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이다.
광훈(光勳:할아버지) · 정중 (鼎重:아버지)에 이어 모두 과거에 장원했던 진장(鎭長)은 형조와 호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내려졌다.유중의 아들 진원(鎭遠)은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당시 누이인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검열로
등용되어 병조 정랑과 사복시정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서원의 남설로 지방관철의 재정 소모가 심하고 당쟁의 원인이 된다고 상소하여 서원 건립을 줄이게 했고, 경중 때 공조 판서로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숙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신임사화로 성주(성주)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경종 4) 풀려나와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영조
때는 판중추부사가 되어「가족제복론」을 찬진했으며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와 탕평을 기약했으나 끝까지 소론에 대한
반격을 멈추지 않고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기로소에 들어간 후 봉조하가 되었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이조 판서 진주의 아들 응수(應洙)와 좌의정 진원(鎭遠)의 손자 백상(百祥)도 우의정을 역임하여 명문의 지위를 굳혔으며 첨지중추부사 단현(端顯)의
아들 치구(致九)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판서를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치록이 딸이 명성왕후(조선 제 26대왕 고종의 비)가 되자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명성왕후는 16세 때 왕비로 뽑혀 한말의 격동기에 국내외의 정치적 거센 바람을 한 몸으로 감당하여 대원군고 권력 싸움으로 파란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치록의 아들 승호(升鎬)가 여동생 명성왕후를 도아 국정 전반에 참여하여 민씨일족의 거두로서 세도가 등등했으며, 겸호는 고종
때 판돈평부사를 지내고 정치제도의 개혁 후에 선혜청 당상관에 올라 영의정에 오른 규호(奎鎬)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의 순국열사 영환(泳煥:겸호의 아들, 태호에게 입양)은 여흥 민씨가 자랑하는 인물로 18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 동부승지와 대사성을
거쳐 예 · 형 · 병조의 판서를 비롯한 한성판윤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백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모여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 >로 시작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이듬해 봄 그 자리에서 대가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외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상해로 망명한 영익(泳翊),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종식(판서 영상의 아들),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했던 강( ), 의병장으로 강원 · 충청 · 경상도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긍호 (肯鎬), 대동단에 가입하여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군자금을 조달했던 치도(致道),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형식(衡植),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제호(濟鎬),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무장 경위대를 조직하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필호(弼鎬) 등이 국운이 기울어가는 구한말과 일제 암흑기에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서 겨레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절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고려 충숙왕 (27대)때에 수정승을 지낸
학자인 민지를 시조로하는 '문인공파'와 같은 시기에 대제학을 지낸 민적을
시조로하는 '문순공파'로 나뉘어 진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민씨는 남한에 총 33, 706가구, 141,3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중원군 일원
전남 영광군 신북면 갈곡리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경남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일원
전남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 노하리
황해도 벽성군 추화면 마용리
여흥 여흥민씨종친회 02-765-5413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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