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봉우는 1107년(고려 예종2년)에
한 할머니가 강화의 하음면 바다가에 돌로된 상자가 떠다니는것을 발견하고 건져내고
보니 범상치않은 아기가 들어 있어서 이 아기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이 기이하게
여겨 궁중에서 키우고 봉우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봉우는 고려
인종(仁宗) 때 좌복야(左僕야 : 도서 도성에 속하는 정2품 벼슬)지내고
공을 세워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본관을 하음으로 하였다.
시조 봉우의 묘는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마니산에 있으며 3월 7일과 10월 8일에 한다.
봉씨의 본관은 하음 외에도
강화 (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
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봉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에 대해서는 상계가 미상이다.
경기도 강화군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동음내현 (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호음현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했다. 고려조에 하음현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가세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 (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때 원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을
호종하는데 공을세워 일등공신으로 하음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을 거쳐 합문지후와 판도판서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때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문종의 비)가 되었고, 그의 아우 즙(楫)은
세종조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을 중흥시켰다.
즙(楫)의 아들인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때 감찰을 거쳐 강원도 도사을 역임한 원효(元孝)와 세조때 정난이등공신로
강성군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과 함께 하음봉씨를 대표했다.
봉씨 (奉氏)는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469가구, 10,5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