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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씨 (司空氏)는 중국(中國) 돈구(頓丘:직예성 대명도 청풍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진(晋)나라 때 가신(賈辛)이란 사람이 사공(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벼슬 이름을 성(姓)으로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사공씨의 연원(淵源)은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사공도(司空圖)가 897년(신라 효공왕 원년) 8학사의 한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동방의 거유(巨儒)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유하며 당문화(唐文化) 보급에 앞장섰고, 그후 귀화하여 사공씨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불명(不明)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고려 충숙왕(忠肅王: 제27대 왕, 재위기간: 1313∼1370, 복위: 1332∼1339)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의시사(判儀시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효령군(孝令君)에 봉해진 사공중상(司空仲常)을 중조(中祖)로 받들고 봉군지명인 효령(孝令)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중상 (仲常)의 아들 실(實)이 1353년(공민왕 2) 이 색(李 穡)·박상충(朴 尙衷)·정 추(鄭 樞) 등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광흥창사(廣興倉使)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한림박사(翰林博士)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을 떨쳐「동방명현록(東方名賢錄)」에 수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민(敏)은 공민왕 (恭愍王)과 창왕대(昌王代)에 걸쳐 사복시정(司僕시正)과 삼사 부윤(三司府尹)을 지내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달(達: 민의 아들)의 아들 주(周)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올랐으나 세조(世祖)가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미자 낙향하여 세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경어재(耕漁齋) 주(周)의 아들 발(發)은 문종(文宗) 때 통훈대부(通訓大 夫)에 올랐으나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이들이 종파(宗派)·중파(仲派)·계파(季派)로 갈라져 가문의 중추(中樞)를 이루었다.
성종(成宗) 때 선무랑(宣務郞)으로 개성부 직장(開城府直長)을 지낸 맏아들 비( )의 후손에서는 효성(孝誠)과 학문(學問)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精:비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지낸 회(誨:정의 손자), 훈련원 봉사 (訓鍊院奉事) 선(銑), 평구도 찰방(平丘道察訪)의 용(鎔) 3부자가 유명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습(習)의 아들로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지낸 양(亮)과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을 역임한 기(琦)의 형 제가 뛰어났고, 찰방 용(鎔)의 손자 지(祉)는 숙종(肅宗) 때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을 역임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우(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균(均), 순조(純祖) 때의 병마절제사(兵馬切除使) 현(鉉), 장악원정(掌樂院正) 억(檍) 등과 함께 효령 사공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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