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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뿌리 > 성씨의 유래 
「창녕성(成)
성인보 (成仁輔)
시조 성인보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저의 후예라고 한다 .
성인보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중윤을 지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명종때 사람으로 고종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하며, 창녕읍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해 정월초 인보는 송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하자 문하시중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엎고 울며 천리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 만큼은 눈이 녹아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인 성(成에 읍변이 붙은 것)을 성씨로 삼았으나 초나라 에게 나라가 망하자 읍변을 떼어버리고 成씨라고 하였다. 그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의 관계는 고증할 수가 없다.
창녕 (昌寧)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또는 비사벌인데 555년 하주라 했고 경덕왕때는 화왕군으로, 고려 태조때는 창녕으로 개칭하였다.
창녕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 (公弼), 한필(漢弼) 대에서 크게 두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이 우왕때 정당문학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392년 충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의 왕방산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원로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왕씨의 신하이니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며 절의를 지켰다.

이성계와 옛친구로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석린(石璘)은 태종때 좌명삼등공신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석린의아우 석용(石瑢 : 대제학을 역임), 석연(石 : 대사헌 · 우정승 · 호조 판서를 역임 ), 석번(石 :낭장을 역임)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 석용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승(勝)은 중추원 부사을 거쳐 단종때 의주 목사에 이르렀다.
그후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에서 개최될때 도총관 유응부와 함께 운검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질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아들 삼문(三問),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승의 맏아들 삼문은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출생할 때 "났느냐" 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삼문은 집현전에서 학사, 수찬 등을 역임하며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서리발같은 절의와 함께 그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전에 탄로가 나서 아버지 승, 3형제의 동생, 아들 원(元),맹첨(孟瞻), 맹평(孟平),맹종(孟終) 4형제와 더불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을 할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집을 적몰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방에 쌓아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한편 창산부원군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 말에 형부총랑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기울자 개성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영이 있는 파주 문두리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태종때 대사헌과 우정승을 거쳐 형,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의 후손으로는 그의 아들 [암]과 억(抑)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염조(念祖)는 이조정랑, 도승지, 경창부윤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우찬성,영중추원사를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후 우의정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 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때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을 역임했던 임(任)은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에 능하여 해서, 초서, 예서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저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 뿐" 이라면서 거문고를 배웠으나 서른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서거정 이후 사가(四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탈한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염조의 조카 준(俊)은 연산군때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형,우의정 이극균과 함께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 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 하니 결국 그는 갑자사화때 직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정랑에 이르렀으나 아버지가 화를 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 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외 선조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창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찬의 아들)이 뛰어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의 거목으로 문하에서 조헌, 이귀, 정 엽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더욱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남한에 총 37,894가구, 158,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경북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경북 상주군 모서면 삼포리, 지산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대양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석리, 창산리
창년    창년성씨상곡공파종회    02-2263-9862    서울 -중-충무로4-54...(진양상가5층559호)   
昌寧    昌寧成氏 서울 京仁地區 宗親會    02) 312-8375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호 2가   
昌寧    昌寧成氏 광주 .전남 花樹會    062) 222-3433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 91-3   
昌寧    昌寧成氏 울산광역시 花樹會    052) 266-1122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1313-8   
昌寧    昌寧成氏 충남 .대전 종친회    042) 252-3100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 2동 502-4  
昌寧    昌寧成氏 부산광역시 花樹會    051) 514-1043    부산광역시 부곡 3동 225-6   
창녕    창녕성씨화천군파종회    062-224-7433    광주 -동-황금-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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