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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연(延)
연계령 (延繼笭)
  시조 연계령은 중국 흥농 사람으로서 고려 때에 우리나라에 와서 문하시랑과 신호위상장군을 역임하였다 . 11세손 연주가 고려 때 검교 한성부윤을 지내다가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여러차례 벼슬 할것을 원했으나 응하지 않자 후에 곡산군에 추봉되자 후손들이 본관을 곡산이라고 했다.
본관은 곡산 (谷山) 단본이다.
문헌에는 곡산 외에도 개성(開城) · 광주 (廣州) · 남양 (南陽) · 청주 (淸州) 등 30여 본이 전하지만, 모두가 곡산연씨의 세거지 내지 분포지역에 불과하다.
곡산연씨의 시조 연수창(延壽菖)은 본래 중국 허난성[河南省] 사람으로, 공주를 따라 고려에 와서 곡산 땅에서 살았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태자(太子)인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고 3년 뒤에 귀국할 때 수행해와서 귀화한 사람으로 짐작된다.
곡산연씨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으며, 역사상 대표적 인물로는 사종(嗣宗)과 최적(最績)을 들 수 있다.
사종의 아버지 주(柱)는 고려 말에 한성부윤으로 있었으나 정몽주(鄭夢周)가 순절하자 벼슬을 떠나 함흥(咸興)에 은거하였다. 이러한 기개높은 가문 출신 때문에, 사종은 이성계의 총애를 받아 조선 개국 뒤 개국원종공신과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상장군 · 호조전서 · 한성부판사 등을 역임 , 태종 때 동북면병마절제사, 세종 때 의정부참찬 · 중군도총제 등을 지냈고 뒷날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
한편, 최적은 중추부첨지사 택로(宅老)의 아들로서 숙종 때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나 당쟁을 보고 사직하고 학문에 전심하였는데,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장희빈(張禧嬪)의 무고로 폐서인(廢庶人)이 되자 이에 항소하다가 옥사하였다.
인현왕후의 복위 뒤 충신정문이 세워졌고,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워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을 제수받고 안음(安陰)현감을 지낸 충수(忠秀), 한말의 의병대장 기우(基羽), 독립운동가 병호(秉昊) 등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385가구가 있었는데 그중 약 30 %가 충북 괴산군에 집중해 있었고, 지금도 그 일대에 동족부락이 많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 1만 6648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7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6,451가구, 인구 2만 7852명으로 전국 성씨 274성 중 76위였다.
곡산 (谷山)은 황해도 북동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십곡성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진서로 고쳤고 고려초에 곡주로 개칭하였다.
조선 1895년에 곡산군이 되었으며, 별칭은 덕둔홀, 고곡, 진서, 상산 등이다.
11세손 주(柱)가 광록대부로 삼사 좌사에 올라 조선 태종때 곡성군에 봉해졌으며, 주(柱) 아들 사종(嗣宗)은 판한성부사를 거쳐 병마절제사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계령(繼笭)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산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는 연씨의 본관이 곡산 외에도 개성(開城), 광주(廣州), 남양(南洋), 서원(西原), 충주(忠州) 등 36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곡산연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현재의 연는 곡산 단일본으로 전한다.

수창(壽昌)의 아들 경(鏡)은 고려 충숙왕때 삼중대광 문하시중과 태사를 역임한 명신이었으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숙종때 文章家로 유명하였던 최적(最績)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었으나 당쟁이 격화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연씨는 남한에 총 6,300가구, 27,0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 증평읍 사곡리 ,
평남 성천군 삼흥면 광탄리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
곡산 (延)    곡산연씨종친회    02-971-3446    서울 -노원-하계1-168...(3층)   
곡산(延)    곡산연씨종친회    02-971-3446    서울 노원 -하계1-168-1(3층)   
중국의 연씨 : 우리 연씨(延氏)란 성은 중국 사기(史記)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그 후 후한의 연독 (延篤)이나 당나라의 연쇄명(延灑明), 연상(延尙) 같은 분은 큰 벼슬을 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연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근래에도 서울 종친(宗親)들간의 모임인 연성회(延盛會)의 주선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 국회의원 연국부 (延國符)씨를 초청 내한하시어 본회 주최로 한국일보사에서 환영회를 가진바 있으며 그후 귀국하시어 당시 본회의장 연제원(延濟源)의원을 초청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우리 곡산 연씨(谷山 延氏)도 근원은 중국일진대 우리와 같은 혈족임에 틀림 없으리라 믿으며 우리 족보(族譜)에 오른 분으로는 송(宋)나라 때 황하 중류에 위치한 홍농(弘農) 땅에 연계령(延繼 ?) 선조를 효시로 하여 6세 연세린(延世麟) 선조까지 중국에 살아오신 우리의 선조로 전하여 온다.



우리나라의 연씨 : 때가 송나라가 쇠하여 남쪽으로 천도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오고 일약 강성해진 원나라가 중국을 거의 다 점령 할 즈음 7세로 연수창(延壽菖) 선조께서 1256년 병진생으로 이미 원(元)나라가 된 홍농(弘農) 땅에 태어나셨으니 이분이 바로 이땅에 오신 우리나라에서의 우리의 시조(始祖)이시다.
이즈음 고려는 1258년 원나라에 항복을 한 후 고려 원종의 아들 충열(忠烈)을 1260년에 원경으로 데려가 볼모로 삼았다.
원나라 세조 홀필열(忽必烈)은 자기 딸 제국대장공주 (帝國大長公主)를 충열과 결혼시키니 이것이 원나라와의 혈연을 맺은 시초가 된다.
이즈음 연수창(延壽菖) 선조께서는 원나라의 문하대장군(門下大將軍)의 벼슬을 하고 계실때에 고려는 원종이 죽고 아들 충렬이 원경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때 왕비로 제국공주도 같이 오게 되었으니 이해가 고려 충렬왕 원년으로 1275년이며 연수창, 문하대장군께서는 원나라 천사(天使)로 제국공주를 배래하시고 이때가 발을 들여놓은 첫해가 되는 것이다.
이에 연수창 선조께서는 고려에 오신 후 계속 제국공주 즉 충렬왕비를 시어하시며 고려 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을 하시다가 1297년 5월에 제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공께서도 벼슬을 내놓으시고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여생을 지내시다 1319년 충숙왕 6년 기미 10월 9일 세상을 떠나시니 이런 연유로 그 자손들의 본관을 곡산이라 하여 곡산 연씨(谷山 延氏)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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