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염씨 (坡州廉氏)는 중국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손 염형명(廉邢明)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는 후당(後唐)의 국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신라에 들어와 봉성에 자리잡은 뒤 대사도(大司徒)를 지내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후 고려때 와서 후손 한(漢)이 무신으로 동해에 침입해 온 해구를 격퇴하였고, 북변을 침범한 동번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
상주국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현손으로 전하는 신약(信若)은 명종대에 이름난 명신이었다.
충렬왕때 도첨의 중찬을 지낸 승익(承益)의 손자 제신(悌臣)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원나라에 가서 평장사로 있는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수학하며 원나라 태정황제의 총애를 받아 정동성 낭중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 좌정승에
올랐다.
그후 영삼사사와 영문하부사를 지냈으며 곡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제신(悌臣)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처음에는 봉성으로 하였다가 곡성으로 개관하였으나 곡성현이 서원으로 개칭됨에 따라 다시
서원을 본관으로 삼았고, 조선 연산군때 와서 서원이 다시 파주로 개칭됨에 따라 현재의 파주를 본관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염씨의 시조는 중국 황제의 후손이다 .
헌원씨 때는 공손씨라 했다가 희수지방에 이주하면서 희씨로 성을 바꾸었다.
희창의의 아들 전욱의 증손이 대염씨라고 했다가 다시 왕보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의 후손이 중국 하동으로 이주 하면서 염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후 호조판서에 이르렀던 염교명이 신라 말기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 봉성(파주)에 들어와 살면서 파주 염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염제신(시호 충경, 1304~?)이 11살에 원나라에 들어가 고모부 말길(평장사)의 집에서 10년간 공부를 하고 정동성 낭중이되었다가
어머니 병환으로 귀국한 후 고려 충목왕 때 도첨의평리, 찬성사를 역임하고 공민왕 때에 좌우 정승을 거쳐 도첨의 문하시중에 이르러 곡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30여년 동안 많은 공적을 남겨 공민왕이 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친히 유상을 그려 주었는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염씨의 본관은 처음에는 봉성이었으나 중시조 염제신이 곡성 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한 후 지명이 바뀌자 단원, 파주로 바뀌었다.
염씨(廉氏)의 본관은 파주를 포함하여 광주, 개성, 순창, 담양 등 83본까지 [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파주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염제신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강남면에 있다.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 ,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파주사현(坡州史縣)이라 칭하였고, 1398년(태조 7)에는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縣)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교하현(交河縣)을 폐지시켜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뒤에 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1461년(세조
7)에 파주목(牧)으로 승격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본주(州)를
유행지소(遊幸之所)로 삼고 나머지 땅은 인접 고을에 소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파주목으로 복귀, 1895년 파주군(坡州郡)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군을 폐합하였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을 살펴보면 제신 (悌臣)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는데. 맏아들 국보(國寶)가
공민왕때대제학을 지낸후 서성군에 봉해진후 삼사좌사가 되었으며, 특히 학문에 뛰어났다.
막내인 정수(廷秀)는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염씨는 주로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공조판서를 지낸 증(憎)과 서산 군수와 단천부사를 역임한 상항(尙恒),
상호군 종항(從恒)등이 뛰어났고,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선무이등공신에 책록된 걸(傑)과
서(瑞)는 명문인 파주 염씨를 빛냈다.
염씨 (廉氏)의 본관은 파주를 포함하여
광주, 개성, 순창, 담양 등 83본까지 [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파주염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