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씨 (元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양왕(襄王 : 제18대 왕, 재위기 간 : 기원전
651 ∼ 619) 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훰(元 )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唐)나라 태종(太宗 : 제2대 왕 재위기간 : 627 ∼ 649)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원 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 (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 · 원성백계 (原城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 · 시중공계 (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원씨 (元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나라 양왕때 위대부에 봉해진 원훤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원씨(元氏)의 시조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 중의 한사람인 원경(元 鏡)이다.
원주를 단본으로 하는 원씨는 동원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세계통이 있다.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 원성백계(原城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
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계대하고 있으며, 상호군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가 되었다
원주는 강원도 원석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 940년에 원주로 고쳤다. 그후 일신현, 정원도호부, 익흥도호부 등을 거쳐 1955년 일부가 원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이 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에서는 호장 극부 (克富)의 7세손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말에
이성계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그는 절의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천석의 아들 형(泂)을 풍기감무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 고려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며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의 증손 보륜(甫崙)은 지평과 교리를 역임했고, 6세손 황은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우윤에 올랐으며, 그의아들 진해(振海)는 횡성현감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다
원성백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 진(瑨)의 아들 부(傅)가 추밀원 부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후에 첨의중찬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 선지(善之)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의 난때 왕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으로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때 정당문학으로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송수의 아들 상(庠)은 고려말에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어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의 구제소로 광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단의 대덕산에 은거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은 세종 때 조견례(朝見禮)를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옷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돈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의 인맥으로는 별장 헌(憲)의 아들 호(昊)가 유명했다.
그는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가자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 남송촌에 은거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자 호(昊)는 열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으로 단종이 있는곳을 향해 예(禮)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당하자 3년상을치르고 원주 옛집으로
돌아와 폐문 불출 하였다.
세조가 호조참의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임진왜란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을 떨쳤던 호(豪)는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 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이었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은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에 공을세워 정사 3등공신으로 원계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좌찬성,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이조 및 병조의 판서를 지내고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詩), 서(書)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과 충절을 지켜온 원주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원씨는 4파가 있는데 각각 시조를 다르게
하고 있다. 응암 운곡계는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에 파견온 원경을 시조로
하며, 원성백계는 원극유, 시중공계는 원익겸, 충숙공계는 원충갑을 시조로
하고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만
6018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51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10만 4472명, 전국인구구성비 0.3 %로 274성 중 역시 제51위였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
전북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도일리
평북 귀성군 노동면 중방동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신평리
평남 성천군 삼덕면 장상리
강원도 원성군 건동면 취병리
평남 성천군 쌍룡면 용문리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남산리
원주 원주원씨서울종친회 02-2238-6487 서울
중 -신당-377-22(2동원씨종친회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