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비밀번호
회원가입  |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2026년
음 : 09-17
양 : 10-27
서기:2026년
단기:4359년
불기:2570년
위아래 - 세상 끝난 뒤에도 -
 
 home > 뿌리 > 성씨의 유래 
「봉주지(智)
지채문 (智蔡文)
시조 지채문 (智蔡文:호 松谷, 시호 貞憲)은 봉주 사람으로 16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제학 지제고에 이르렀다.
1010년(현종 1) 중랑장으로 있을 때 거란병의 침입을 화주(지금의 함흥)에서 격퇴, 강조가 패사한 후에 서경(평양)을 고수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나주로 피난할 때 그가 호종한 공으로 밭 30결을 하사받았다.
그 후 우상시가 되어 무관직을 겸하게 되었고, 1026년 우복야에 올랐다.
덕종 때 상장군 좌복야에 추증되고 1등공신에 추록되었다.
그는 고려 초기의 명장으로 《명장록(名將錄)》<고려편>에 그 이름이 보이고 조선조의 명신 홍언필(洪彦弼)이 김유신(金庾信),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에 비길 만한 명장이라고 극찬했다
본관은 봉주 (鳳州:鳳山) 단본이다.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단본으로 전한다.
봉산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 본래 고구려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휴류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 (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을 지냈고 1104년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 동북면 병마사 등을 역임한 후 1125년 동지중추밀원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부사 기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 김여간, 계숭로, 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여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는 가구수 631 가구로 249성 중 제122위였고, 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179가구에 인구 5,028명으로 274성 중 제120위였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천동리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응암리
 
 
 
 
위원회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제휴문의 | 광고문의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민주로 32번길 29 (쌍촌동)     상호명 : 광산탁씨전자족보운영회
단체고유번호: 410-80-40462  대표: 탁인석    전화번호 062-374-0045
© HUMEN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