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홍농 출신으로 , 「충주지씨족보」에
의하면 경(鏡)은 960년(고려 광종 11) 태학사(太學士)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보(太保) · 평장사
(平章事)에 이르렀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시조의 6세손 종해(宗海)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후 추우언백에 봉해져 충주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충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지씨는「조선씨족통보」에 충주를
비롯하여 단양(丹陽) · 광주 (廣州) 등 무려 89본까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충주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세거지명에 불과하다.
충주는 충청북도 중원군의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 고구려 때 국원성 또는 미을성, 완장성, 탁장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 때 중원경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로 개칭하고 뒤에 창화군(昌化郡)이라 하다가 고종때 국원경이 되었으며, 조선 명종때 유신현으로 부르다가 선조
즉위년에 다시 충주로 환원되었다.
충주 지씨는 특히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는데 , 그중 문하시중 평장사 항(恒)의 둘째
아들 용수(龍壽)와 찬성사 윤(奫), 문하찬성사 복룡(福龍)의 아들 용기(湧奇)
등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용수는 찬성사 호문(好文)의 7세손으로, 공민왕 때 서북면 지병마사로 홍건적을 물리치고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서북면 도순무사(都巡撫使)가
되어 수차에 걸쳐 왜구와 야인을 물리쳐서 크게 명성을 날렸고, 윤(奫)은 우왕 때 찬성사를 거쳐 서북면 도원수(都元帥)가 되었고 이어 판판도사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용기(湧奇)는 우왕 때 호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문하평리에 올랐으며, 이어 지밀직사사로서 양광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1388년 요동 공격 때는 안주도 부원수로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문하찬성사에 이어 판삼사사로 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별장(別將)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된 여해(汝海)가 유명했으며, 학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달원(達源)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근대에 와서는 우리나라에 우두법을 처음으로 보급한 의학자 석영의 뛰어났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종두법을 배워 온 박영선에게 종두법을 익혔으며,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법을 배우고 돌아와서는 전주 등지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의 전국 보급을 시작하였고, [우두신설]을 저술하여 국민보건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형인 운영(運永)은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시 · 서 · 화의 삼절로 불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