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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車)
차효전 [車孝全]
시조 차효전은 차무일 (車無一)의 38세손인 류차달(문화 류씨의 시조)의 첫째 아들이다.
류차달의 5대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사냥가는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 하고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황제 (黃帝)의 후손인 신갑(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하였다.고조선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칠남 임(琳)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이때 몽(蒙)은 자손 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성(姓)을 전자(田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로 하였다.

신라 태조가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 무일(車無一)께서 시중의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車氏) 성을 받게 되어 차씨(車氏)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車 無一의 32세손 건갑(建甲 一名 建申)께서 신라 39대 소성왕(昭聖王)시에 승상 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十二歲)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애장왕(哀莊王)을 보필하시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께서 왕례(王禮)로써 기장 만화동(機張 萬化洞)에 예장케 하였다.이때 부터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宗廟)에 배향되었다.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을 하여 왕위를 빼앗아 헌덕왕(憲德王)이 되었다. 차 승색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 공숙(車 恭叔)과 더불어 헌덕왕 암살을 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류柳)씨로 변성하고 이름을 백(栢 一名 )으로, 아들도 숙(淑)으로 고쳐 살았다.
둘째 아들 차 공도(車 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가 구성인 王氏로 복성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런 연유로 車씨는 고려 건국에 큰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車氏는 王氏와 똑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거짓 성) 柳氏 6세인 류 해(柳 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하였으므로 공(公)을 삼한통합(三韓統合) 벽상이등공신(壁上二等功臣)에 봉하고 본성이 車氏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達)이라는 호(號)를 내렸다, 큰아들 효전(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군량미를 헌납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 되었으며 연안백(延安伯)에 피봉되었다. 연안에 식읍 천호도 받으시고 옛성 車氏로 복성케 되고 종적(宗籍)을 연안(延安)으로 하니 연안 차씨(延安 車氏)의 득관 시조(得貫 始祖)가 되었다.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류(柳)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車)씨와 류(柳)씨로 각각 분성되었다.

車門은 신라,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이 대를 이어 배출된 명문 집안이다. 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 차포온(龍山君 車浦溫)은 고려가 元의 간섭에서 벗어 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車門의 자랑스런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이신 운암공 차원부(雲巖公 )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 되시고 車氏 문중도 멸족지화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태조의 질책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에 대한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좌찬성 벼슬을 추정했고 그후 문절(文節)이란 시호도 내렸다.다행히 세조 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 외 5인의 기문, 유신석학 48인의 응제시와 에조참판 하위지의 서문으로 엮은 차원부 설원기(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車氏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다.

車氏 문중에는 특히 세조 13년 이시애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신 강열공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시 평양성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 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훌륭하신 명조 · 현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 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 독립 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 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 유공자에게 정부건국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분들이 車氏 문중 빛내었다.

車氏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안 (延安)은 황해도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때 동음홀 또는 고염성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해고군, 고려에서는 염주, 영응현, 복주, 석주, 온주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때 연안부로 고쳤다. 1914년 백천군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연안차씨종친회중앙총본부 (延安車氏宗親會中央總本部)에서는 종친 제위(諸位)의 열성 어린 참여로 경기도 평택시 장안동 285번지 의1호 길지(吉地)에 연안차씨(延安車氏) 득관시조(得貫始祖) 고려(高麗) 대광(大匡) 연안백(延安伯) 휘(諱) 효전(孝全) 시호(諡號) 무열공(武烈公)을 주위(主位)로 봉사(奉祀)하고 역대(曆代)의 작위조(爵位祖) 각파조(各派祖) 및 명조(名祖)와 아울러 합동묘위(合同墓位)의 삼위(三位)를 배향(配享)하는 규모와 위풍(威風)을 갖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의덕사(懿德祠)라 명명(命名)하고 1996年 5月 12日 전국에서 운집(雲集)한 종친(宗親) 류문(柳門) 및 타성(他姓) 내빈(內賓) 제위(諸位)의 참여하에 성대한 중공전례(竣工典禮)를 거행 하였다 연안차씨 문중에서는 이렇듯 처음으로 득관시조(得貫始祖)를 봉사(奉祀)하는 사당을 영조(營造)하여 문중을 결집하는 묘역(墓域)을 마련 하기에 이르럿다

연안백공(延安伯公)의 초휘(初諱)는 효생이시다 생자(生字) 오른쪽에 일획을 더해 인왕(人王)을 합친 전자(全字)를 쓰시게 되어 휘(諱)를 효전(孝全)으로 정하시게 이르럿다 자(字)는 양운(良運) 호(號)는 강촌(江村)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시다

고려(高麗) 대승(大丞)이신 류공(柳公) 초휘(初諱) 해(海) 사호(賜號) 차달(車達)의 장자(長子)이시고 신라(新羅)승상공(丞相公) 휘(諱) 건신(建申)의 7세손 이시다

대승공(大丞公)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삼국(三國)을 통합하여 고려조를 창업할 당시 삼국(三國)의 최대 갑부(甲富)시었는데 수레를 제공하여 식량을 잇대고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정벌에 쌀을 수송하여 큰 공(功)을 기려 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책록(冊錄)되시었고 대승(大丞)을 봉하기에이르렀다

대승공(大丞公)의 이러한 대공(大功)이 수립되기 까지에는 수레의 제작과 식량을 잇대는 제반 사업을 직접 지휘(指揮) 감독하여 유감없이 원만하게 추진 해 내신 연안백공(延安伯公)의 공로가 지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안백공께서는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대대적인 진휼(賑恤)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시었다 고려 태조의 창업(創業)을 실직적으로 익찬(翊贊)하고 당시 토탄에 빠진 민초(民草)들을 헌신적(獻身的)으로 구원 하신 연안백공(延安伯公)의 의덕(懿德)을 길이 표양(表揚)되어야 마땅하다

의덕사(懿德祠)를 건립하여 연안백공(延安伯公)을 봉사(奉祀)하는데는 득관시조(得貫始祖)를 숭봉(崇奉)하는 뜻과 아울러 연안백공(延安伯公)께서 실천을 보여 주신 이러한 불료불굴(불료不屈)의 봉사정신을 송양(頌揚)하는 의의도 곁드려저 있는 것이다

의덕(懿德)은 훌륭한 덕(德) 아름다은 덕의 뜻으로 높이 뛰어난 덕을 송미(頌美)하여 이르는 말이다《時經》(시경) 대아증민편(大雅蒸民篇)에 민지병이(民之秉彛) 호시의덕(好是懿德)이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등 고대 전적(典籍)에 두루 쓰여진 어휘이다

의덕(懿德)은 연안백공(延安伯公)을 봉사(奉祀)하는 사명(祠名)으로 가장 적합하다 연안백공께서는 이러한 큰 공을 수립하신 것을 표장(表章)하여 차성(車姓)을 사성(賜姓)케하여 수공지성(首功之姓)으로 하였으며 대광(大匡)의 관위 (官位)에 오르시고 연안백공(延安伯公)을 봉(封)하고 식읍(食邑) 천호(千戶)가 하사 (下賜)되었고 연안(延安)으로 종적(宗籍)을 정하시었으니 이리하여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시조(得貫始祖)가 되시었다

제(弟) 좌윤(左尹) 휘(諱) 효금(孝金)은 류(柳) 성을 승습(承襲)케 하고 문화(文化)로 종적(宗籍)을 삼아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 (始祖)가 되시었다 이렇듯 대승공(大丞公)의 이자(二子)께서 연안차씨(延安車氏)와 문화류씨(文化柳氏) 양문(兩門)의 시조(始祖)로 받들어 지기에 이른 것이다

연안백공(延安伯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정열부인(貞烈夫人) 해주최씨(海州催氏)이시다 양위(兩位)의 묘(墓)는 황해도 연안군 금의면(해룡면) 금안산 자좌지원(子坐之原)에 쌍분(雙墳)으로 모시었다 묘역(墓域)의 상황은 안산(案山)이 입석봉(立石峰)이고 망림산(望林山)이 주봉(主峰)이고 좌락(左落)이 비봉산(飛鳳山) 연안읍 북쪽이다 남으로는 해조(海潮)가 보이고 동은 백천(白川)이고 남은 교동(喬洞)이고 서는 해주(海州)이고 북은 평산(平山)이다 용대석(龍臺石)을 갖춘 신도비(神道碑) 석상(石床) 석인(石人)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 진다

운암공(雲巖公)(車原부) 피무참화(被誣慘禍)를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무고한 70여명의 노복(奴僕)까지 죽음을 당하메 자손(子孫)이 사방으로 이산하여 연안백공(延安伯公) 묘소(墓所)의 수호(守護)와 봉향(奉享)이 이어지지 못 하였다 융희4년(隆熙4年)(1910) 경술(庚戌)에 유지(有志) 종친(宗親)의 발기(發起)로 황해도연안(黃海道 延安)에 망단(望壇)과 망단비(望壇碑)를 세워 매년 봉향(奉享)하여 오다가 해방후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됨에 따라 그나마 봉향도 중단 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여기에 의덕사(懿德祠)를 세워 연안백공(延安伯公)을 주위(主位)로 봉사(奉祀)하게 되어 연안차씨문중(延安車氏門中)의 숙원사업(宿願事業)의 성취(成就)를 보기에 이른것이다

[차원부 설원기]

의덕사(懿德祠)에 배향(配享)한 선조는 다음과 같다

16세손 중흥백공(中興伯公) 휘(諱) 송우(訟佑), 17세손 도총제공(都摠制公) 휘(諱)득규(得珪), 동(同) 송림백공(松林伯公) 휘(諱) 덕규(德珪), 18세손 좌승상공(左丞相公) 휘(諱) 포온(蒲溫), 19세손 휘(諱) 문학공(文學公) 수동(壽童), 동(同) 전서공(典書公) 휘(諱) 명동(命童), 동(同) 월파공(月波公) 휘(諱) 종로(宗老), 동(同) 상장군공(上將軍公) 휘(諱) 안로(安老), 20세손 문절공(文節公) 휘(諱)원부(原부), 동(同) 시중공(侍中公) 휘(諱) 인부(仁부), 동(同) 정당문학공(政堂文學公) 휘(諱) 중부(仲부), 21세손 中郞將公 휘(諱) 안경(安卿), 동(同) 병마사공(兵馬使公) 휘(諱) 안기(安耆), 동(同) 강렬공(剛烈公) 휘(諱) 운혁(云革), 26세손 이재공(이재公) 휘 (諱) 식(軾), 27세손 오산공(五山公) 휘(諱) 천로(天輅), 동(同) 창주공(滄州公) 휘(諱) 운로(雲輅), 20세손 밀직공(密直公) 휘(諱)밀부(密부), 22세손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휘(諱) 상도(尙道), 27세손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휘(諱) 금로(金輅), 동(同)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제로(帝輅) 이상 제위(諸位)를 소묵(昭묵)으로 나누어 배향(配享)하였다



의덕사(懿德祠)를 건조(建造)한 길지(吉地)는 장안동의 문절공(文節公) 차손(次孫) 휘(諱) 상의(尙義)의 후손들의 집성촌(集姓村) 역내(域內)의 땅이다 장안동 종친들은 그곳 광활한 구릉(丘陵) 지대를 묘역(墓域)으로 지켜왔다 년전(年前)에 서울 망우동(忘憂洞) 선영(先塋)이 도시계획에 편입 되어 장안동 종친들의 호의로 월파공(月波公)이하 선조 제위(諸位)를 장안동 공동 묘역(墓域)으로 면례(緬禮)하여 세향(歲享)을 모시게 되었다 그후 역시 장안동 종친들의 동의를 얻어 공동 묘역내 (共同墓域內)의 길지(吉地)를 택하여 의덕사(懿德祠)를 건립(建立)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장안동 종친들의 숭조목종(崇祖睦宗)의 모범적(模範的)인 실천을 통하여 연안차씨 문중의 결속을 전례없이 촉진 하기에 이르러 그 공헌(貢獻)은 실로 더 없이 큰 바가 있다 그리고 의덕사(懿德祠) 영조(營造)를 위해 성금을 출연(出捐)하신 수다한 종친(宗親)들의 열의와 건립(建立)공사를 추진 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심혈을 기울여 온 여러 종친(宗親)들의 노고는 문중(門中)에 길이 기여 될 것이다
본관은 연안 (延安) 외에 용성(龍城) · 남해 (南海) · 평산 (平山)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연안차씨 단본이며, 나머지는 그 분파 세거지(分派世居地)를 뜻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연안차씨세보》에 따르면 차씨(車氏) · 유씨 (柳氏)의 상고세계(上古世系)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차건신(車建申:建信, 일명 建甲)은 신라 소성왕 때의 중신(重臣)으로, 왕이 임종할 때 태자(애장왕)에게 전위(傳位)하기가 불안하여 노(老)재상인 그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
현재도 그의 묘는 부산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萬化里)에 있으며 세칭 ‘ 차릉 (車陵) ' 으로 불리고 있다 . 한편 차승색(車承穡:柳穡)은 신라 애장왕 때 좌의정을 지낸 충신으로, 애장왕의 서숙(庶叔) 언승(彦昇)이 왕과 왕자를 시해하고 왕위(헌덕왕)에 오르자, 전왕의 원수를 갚고자 헌덕왕을 죽일 계획으로 거사하였다가 실패하고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에 은거하였다.
그는 성을 조모의 성을 따라 양씨(楊氏)로 고치려다가 ‘ 변양위류 (變楊爲柳) ' 하여 유씨(柳氏)로 고치고 이름도 색(穡) 외자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유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 때의 대승(大丞)이다. 그는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칠 때 식량을 지원한 공으로 대승에 오르고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 태조는 두 아들 중 첫째 효전(孝全)에게는 차씨(車氏)로 하게 하고 관적(貫籍)으로 ‘ 연안 ' 을 주었으며 , 둘째 효금(孝金)에게는 유씨(柳氏)를 잇게 하고 ‘ 문화 (文化) ' 라는 관적을 주었다 .
차씨는 고려 말기부터 대대로 벼슬에 올랐는데, 17세(世) 거수(擧首:史館直事)는 약춘(若春:兵部侍郞) · 약송 (若松:守太尉 中書平章事) 두 형제를 두었다.
16세인 송우(松祐)는 고려 고종 때의 공신으로 그의 후손에서 연안차씨는 문학공파(文學公派:壽童) · 전서공파 (典書公派:命童) · 월파공파 (月波公派:宗老) · 송림백공파 (松林伯公派:德珪)의 4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월파공파가 주축으로 다시 17파로 분파한다.
고려 말기의 명유(名儒) 원부(原 )는 월파공 종로(宗老)의 셋째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정몽주 등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다.
이 때부터 그 자손들이 속속 등용되어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1명을 비롯하여 유명한 ‘ 3세 5문장 ' 과 ‘ 사의사 (四義士) ' ‘ 육절사 (六節士) ' 등 많은 문인과 충신 · 열사를 배출하였다 .
대표적 인물로는 천로(天輅)가 있다. 그는 문명을 명나라에까지 떨쳤는데, 한석봉(韓石峰)의 글씨, 최립(崔 )의 문장과 그의 한시는 ‘ 송도삼절 (松都三絶) ' 로 일컬어졌다 .
그의 아우 운로(雲輅), 형 은로(殷輅)도 모두 문장에 뛰어났다. 조선 순조 때 시문가(詩文家)로 명성을 날린 좌일(佐一)은 천로의 6대손으로 서화에도 뛰어났다.
한편, 문학공파의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한 충량(忠亮) · 예량 (禮亮) 형제와 종제 원철(元轍), 충량의 아들 맹윤(孟胤)이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 ‘ 차문 사의사 (車門四義士) ' 라고 한다 . 이보다 앞서 임진왜란 때에도 많은 의사와 열사가 나왔는데 함경도 일대에서 의병으로 싸운 득도(得道) · 응린 (應麟) · 덕홍 (德弘)의 3의사, 평안도와 호남 일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은진(殷軫) · 은로 (殷輅)의 쌍의사(雙義士)가 유명하고, 광해군 때의 요동 출병에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응하(金應河)의 휘하에서 순절한 재중(載重) 등 ‘ 육절사 ' 가 있다 .
이 밖에 세조 때 ‘ 이시애 (李施愛)의 난 ' 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운혁 (云革), 헌종 때 서예가로 이름난 헌규(憲奎) 등이 두드러지고, 근세의 인물로는 한말의 의병대장 도선(道善),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이석(利錫) 등이 있다.
차씨는 평남 · 평북 · 함북 등 주로 북한에 집단 거주하고 있으며 남한에는 경남 함안과 울산에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 .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1만 7490가구에 9만 8696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37위였는데, 85년 조사에서는 가구수 3만 8126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0.4 %로 274성 중 제39위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차씨(延安車氏)는 남한에 총 37,092가구, 154,6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 승주군 별양면 우산리
경남 합천군 청덕면 성대리, 삼학리, 운봉리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평남 평원군 동송면 군자리, 월봉리

평북 구성군 구성면 하단동, 동산면 선흥동
평남 대동군 용산면 구촌리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동
평남 순천군 밀전면 원창리, 풍산면 고읍리
연안    연안차씨종친회중앙총본부    02-583-9371    서울 서초 -방배-437-4(4층)   
차류    차류대종회중앙총본부    02-822-7177    서울 -동작-대방-385-24
황제 (皇帝)의 후손인 신갑(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칠남 임(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때 몽은 자손 번창을 이유로 왕(王)씨 성(姓)을 전자(田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 태조가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車無一께서 시중 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 성을 받게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 무일의 32세손인 건갑(建甲 또는 建申)께서 신라 39대 소성왕 때 승상 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에 보위에 오른 애장왕을 보필하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하시니 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되었다.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아 헌덕왕이 되었다.
차승색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류(柳)씨로 변성하고 이름을 백(栢 또는 桓)으로, 아들도 숙(淑)으로 고쳐 살았다. 둘째 아들 차 공도(車 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인 왕씨로 복성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런 인연으로 車氏는 고려 건국에 큰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씨와 똑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 柳氏 6세인 류 해(柳 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하였으므로 공을 삼한통합벽상이등공신에 봉하고 본성이 車氏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達)이라는

호를 내렸다. 큰 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군량미를 헌납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之伯)의 벼슬이 제수 되었으며 연안군(延安君)에 피봉되었다. 연안에 식읍 천호도 받으시고 옛성 차씨로 복성케 되고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니 연안 차씨 득관 시조(得貫 始祖)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각각 분성되었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 많은 문무장상이 대를 이어 배출된 명문 집안이다.
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 차포온(龍山君 車蒲溫)은 고려가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 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차문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고려조(高麗朝)의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암공 차원부(雲巖公 車原 )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 되시고 차씨 문중도 멸족지화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태조의 질책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에 대한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좌찬성 벼슬을 추증했고 그후 문절(文節)이란 시호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 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 외 5인의 기문과 유신석학 48인의 응제시와 예조참판 하위지의 서문으로 엮은 차원부 설원기(車原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다.
차씨 문중에는 세조 13년 이시애난 평정에 공을 세운 강열공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시 평양성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 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명조 · 현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 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 독립 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 유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 분들이 차씨 문중을 빛내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많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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