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천암 (千巖)은 중국 서촉의 천고봉
만인암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양천씨 매헌공 가승보]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천암은 1368년 도총장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중시조 천만리(千萬里)가 1555년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총절사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가 되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 겸 총독오군수에 승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만리는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 이여송과 더불어 조병영양사 겸 총독장으로서 두 아들 상(祥)과 희(禧)를
데리고 철기군 2만을 인솔하여 조선에 건너와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만리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땅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에 봉했으며 30결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고,
맏아들 상(祥)은 한성부 좌윤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 찰방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후 숙종때 왜란 평정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명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천만리의 묘소는 전북 남원군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
-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 호암서원에서 음력 8월 1일에 향사한다.
본관은 영양 (潁陽) 단본으로 전해진다.
영양은 중국 노(魯)나라의 지명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영양 외에도 개성(開城) · 강화 (江華) · 광주 (廣州) 등 무려 97본이
있으나, 모두 영양천씨의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 《영양천씨세보》에
따르면 시조는 명(明)나라 초기의 조신(朝臣)인 암(巖)이며, 그의 후손이
영양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영양은 중국 노 (魯)나라의 지명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禦侮將軍)으로 선전관을 역임했던 경주(耕疇)와 호조정랑을
지낸 태주(泰疇) 형제가 유명했으며, 찰방 희(禧)의 아들 거주와 자주는
영월 군수와 이원 현감을 각각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그외 통훈대부로 선공감역을 지낸 장주(長疇)와 광주부윤 찬명(贊銘), 동지중추부사 순명(順銘), 군자감정 인명(仁銘), 칠원 현감 경필(慶弼),
형조참의 우열(宇烈) 등이 뛰어났으며, 훈련원 판관을 지냈던 해는 한성부 좌윤 록, 예조참판 용서(龍瑞), 동지중추부사 인운(仁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순조때 와서는 이름난 시인으로 서민문단의 모제를 이루었던 수경(壽慶)이 한양 옥류천 근처의 송석(松石) 틈에 초당을 짓고 스스로 송석도인이라
하며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열어 팔도의 시객(詩客)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일생을 살았다.
수경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이름을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로 지었다. 일송과 이석은
자신의 아호인 송석원(松石園)에서 따고, 셋째 아들 삼족은 아들이 셋이니 그만하면 족하다는 뜻이고, 넷째 사과는 아들이 넷이면 너무 과하다는
뜻이며, 오하는 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이 밖에 근세 국권피탈을 전후하여 항일독립전선에서 활약한 인물이 많은데, 한말 이강년(李康秊)의 좌익장으로 활약한 보락(普洛)을 비롯하여
고종 때 외부주사를 지내고 도미,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세헌(世憲),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우규(姜宇奎) 등과 노인단(老人團)을 조직하여 활약한 수점(手漸), 6 · 10만세운동과 일제 말기 ‘ 신사참배 ' 거부로 옥고를 치른
성결교 목사 세광(世光) 등이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따르면 인구 5만
7057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53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2만 3412가구에 9만 7412명으로,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53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