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형씨의 본관은 진주 , 풍기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진주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시조 형옹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에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중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삼중대광을 지냈으며 남양의 관적을 하사 받았다. 그후 그의 16세손 형공미(邢公美)가 작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내고, 1280년(충렬왕 6년) 도원수가 되어 일본 일기도에서 왜군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 졌으므로, 후손들은 그의 할아버니 형방(邢昉)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주(반성)로 하였다.
진주 (晋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인데 통일신라 문무왕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
하였고, 757년 강주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로 개칭되었다. 고려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뒤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진주형씨 (晋州邢氏)는 방의 현손 찬(贊)이
조선조에서 판도판서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를 지낸 후
이부상서. 정당문학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때 선전관. 강계부사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외 호조참판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으로 이름났으며, 협(浹)은 효종때 판중중추부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총 411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219가구가 전북 남원 · 임실 · 장수 등에 , 90가구가
전남 화순 · 구례 · 나주 등에 집중해 있었다 . 196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2,333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12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291로 274성 중 117위였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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