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Guus Hiddink (거스 히딩크)
별명
희동구, 왈루스(두 개의 뻐드렁니가 유난히 긴 물개), 엘 블란도(스페인어: 부드러운,온화한)
생일
1946년 11월 8일
가족사항
부 해리트 히딩크, 모 요프 히딩크의 3남 중 장남, 슬하에 2남
출생지
네덜란드 두티헴
특기
공격축구(지도 스타일 : 4-4-2 전술)
소속
대한축구협회 /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학력
체육학박사.경영학박사
수상
체육훈장 청룡장. 명예국민증 (2002.7.2)
시조 희동구 (希東丘)의 본명은 Guus
Hiddink (거스 히딩크)로 네덜란드 사람이다.
희동구(希東丘)는 2002년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인 월드컵 대회에 한국 국가 대표 선수단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선수단의 실력을 배양하였다.
희동구(希東丘)가 이끄는 태극전사는 월드컵 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세계의 축구 강국의 힘든 강팀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세계사에서 전무한 아시아팀에서
유일한 세계 4강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한국 축구 대표팀인 태극 전사의 선전은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 체재로부터 탈출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한국 축구의 세계 4강은 붉은 악마로 불리는 국민 응원단의 탄생으로 800만명에 이르는 전국민 길거리 응원의 새로운 응원 문화를 싹틔웠다.
이 모든 열광에는 희동구(希東丘)의 탁월한 지도력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을 위시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희동구(希東丘)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하였으며, 대한 민국에서 최초로 법무부에서 명예국민증
(2002.7.2)을 인증받았다.
이에 대한민국 대표 족보 사이트 종친회에서는 희동구(希東丘)의 업적을 기려 그에게 화란희(希)씨의 시조로 인증한다.
네덜란드 (Netherlands)
유럽 북서부에 있는 나라.
위치 : 유럽 북서부
면적 : 4만 1526㎢
인구 : 1577만 7000명(1999)
인구밀도 : 465.5명/㎢(1999)
수도 : 암스테르담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네덜란드어
통화 : 길더(Guilder : f.)
환율 : 2.05f. = 1달러(1999.10)
1인당 국민총생산 : 2만 5830달러(1997)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 속령으로 카리브해(海)의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제도(6개의 섬으로
구성)가 있다. 유럽 북서부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며, 공용어는 네덜란드어이다. 동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며,
서부 및 북부는 북해에 접한다.
자연
네덜란드는 라인 · 마스 · 발의 3대 하천의 하류유역에 있는 저지국으로, 동부와 남단부에는 약간의 구릉지가 있지만, 최고부(남동단)가 322.5m에
불과하다. 전국토의 13%가 해발고도 1m 이하이고, 25%가 해면보다 낮으며, 최저부는 해면 아래 6.7m나 된다. 거의 전지역이 홍적세(世)의
빙하지역에 속하며 이것은 라인삼각주의 형성을 촉진시킨 원인이 되었다. 라인삼각주는 남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북해에 면하는 삼각주 지대
노르트홀란트주(州)와 조이트홀란트주에서는 배수로 · 제방 · 풍차 · 양수장 · 수문 등의 전형적인 폴더 (polder:네덜란드의 해안 간척지)
경관을 이룬다.
폴더의 크기는 2 ∼ 3ha에서 2,000 ∼ 3,000ha까지 있다. 동부 · 남부 · 중부의 고지대는 사질토양으로 , 라인 · 마스 ·
발의 3개 하천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북동부의 드렌테주와 그로닝겐주, 남동부의 림뷔르흐주에는 빙하시대에 형성된 이탄층(泥炭層)이 보인다.
서해안의 사구는 6,000년 전에 영국해협의 해류가 북해에 부딪혀 형성되었기 때문에, 북부 · 서부의 연안지방에는 해성점토층 (海成粘土層)이,
하천유역에는 하성점토층(河成粘土層)이 많고, 나무와 돌은 거의 없다. 이 나라에서는 대개 이 점토를 재료로 하는 벽돌로 집을 짓는다.
북해에 면하여 있는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은 대단히 복잡하며, 프리지아제도가 선으로 이어진다. 기후는 서안해양성기후에 속하며, 북위 50 ∼
53 ° 의 고위도에 위치하지만 ,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다. 7월 평균기온 14.7 ℃ , 1월 평균기온 2.7 ℃
이다 . 비교적 안개가 많고, 1년 내내 강력한 서풍이 불어와 8,000개 이상의 풍차를 회전시킨다(현재 풍차는 다른 동력의 개발로 1,000개
정도만이 관광용으로 잔존한다). 연평균강수량은 712mm 정도이며, 특히 여름 · 가을에 우량이 많다 . 이는 감자 · 사탕무 재배에 적당하지만
, 봄에는 건조한 편이므로 작물의 생육을 저해하고, 또 사질토양에서는 바람이 강할 때 풍식(風蝕)을 일으킨다. 겨울 강수는 가을의 잉여강수와
함께 지하로 침투하여 토양의 표백화 작용을 한다.
위도 관계로 일조시간은 여름(6월)이 4 ∼ 21시까지, 겨울(12월)이 8시 30분 ∼ 16시 30분까지이며, 여름에는 국민 전체가 휴가를
즐긴다. 자연식생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야생동물도 거의 없다. 북부의 프리슬란트주에는 대규모 소택지가 있으며, 연안의 모래 언덕에는 방사용(防砂用)
식물과 잡초가 자란다. 사막에는 히스가 자란다. 오베레이셀과 겔덜란트의 수많은 오크나무와 자작나무 산림 및 겔덜란트벨류베 구릉에 있는 광범위한
활엽수림과 침엽수림은 인공식림의 결과이며, 림뷔르흐의 백악질 지층에는 너도밤나무가 자란다.
주민
네덜란드 최고(最古)의 주민은 알프스 인종(작은 체구, 넓은 두개골, 갈색 또는 검정색의 머리털, 갈색의 눈이 특징이며, 특히 중유럽에 많음)에
속했는데, 나중에 일부가 북유럽형 인종(후리후리한 키, 좁은 두개골, 금발, 파란 눈이 특징이며, 주로 북유럽에 많음)에 의해 쫓겨났다.
북유럽 인종의 전형은 서부와 북서부, 특히 남홀란트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알프스 인종의 전형은 남부와 남동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스파냐
통치시대에 많은 신교도가 안트베르펜 주변에서부터, 그리고 루이 11세 때에는 프랑스의 위그노교도가, 16 ∼ 17세기에는 유대인이 유럽의
남부와 동부로부터 종교적 압박을 피하여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이들 외래인의 대부분은 원주민과 융화하였으나, 유대인만은 종교관계로 아직도
별도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주민구성은 네덜란드인 90%와 그외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졌다. 국어는 네덜란드어(語)로 게르만계에 속하며, 특히 독일어에 가깝기 때문에 독일인에게는
네덜란드어로 말하여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방언은 약 18종이 있으며, 근거리에 있는 암스테르담 · 헤이그 · 로테르담의 세 도시 사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 네덜란드어는 본국 및 1개 자치령 외에 벨기에의 북반, 남아프리카 · 프랑스 · 미국 · 캐나다의 일부에서 일상어로
사용된다 주민의 종교는 로마카톨릭교 32%, 네덜란드 개신교 14%, 칼뱅정교 7%, 무교 40% 이다.
역사
기원전 라인강(江)과 마스강의 하구와 북해 연안에는 게르만계(系)의 프리지아족과 바타비아족이 살았는데, BC 50년경 로마인이 진격함에 따라
강화(講和)하거나 정복되었다. 로마인은 토지개량에 주력했으나, AD 400년경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에 따라 이탈리아로 물러갔으며, 남부에는
프랑크족이, 동부에는 색슨족이 침입 · 정착하였다 . 그 후 프랑크의 살리족(族)의 세력이 커졌다가 6세기에는 대(大)프랑크 왕국이 출현하였다.
또 8세기 말에는 프랑크의 샤를마뉴 대제(大帝)가 색슨과 프리지아를 정복하여 네덜란드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네덜란드는
홀란트가(家)를 비롯한 몇몇 봉건국가의 영유지가 되었으며, 13세기 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리프 선공(善公)이 현재의 네덜란드 · 벨기에 ·
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하였다 . 그 후 필리프의 손녀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와 혼인관계를 맺어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합스부르크가가 인척관계에 있는 에스파냐 왕가도 계승하자 1515년부터는 에스파냐왕(王) 겸 독일 황제 칼 5세의 통치를 받았다.
네덜란드인은 종교개혁(1517)에 따라 신교를 믿었는데, 칼 5세와 그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를 마련하고 신교도를 탄압하였다.
이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국(低地國)은 1566년 일제히 궐기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전쟁에 돌입하였다. 특히 저지국의 북부 제주(諸州),
즉 현재의 네덜란드는 오라녜공(公) 빌렘의 지휘로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고, 1581년 북부 신교제주(新敎諸州)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도 완강하여 현재의 벨기에를 탈환하고, 이어 네덜란드까지 공략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1618년부터 30년전쟁이 벌어졌으며, 1648년
네덜란드의 완전독립이 승인되었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도 네덜란드선(船)의 해외 도항(渡航)이 성행하였으며,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東)인도회사가
설립되고, 1621년에는 서(西)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또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1612년에는 현재 뉴욕의 전신(前身)인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였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점거하였으며, 일본에서는 1600년의 네덜란드선 표착(漂着)을 시발로 1641~1855년까지
나가사키[長崎]를 기지로 한 양국간의 무역이 지속되었다.
한국에는 H.하멜이 1653년에 표착하였으며, 1666년에 탈출,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의 사정을 처음으로 유럽에 알렸다. 네덜란드
선대(船隊)가 세계의 해양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전성기였으며, 당시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해항(海港)이었다. 상업의 융성과
함께 문화도 활짝 꽃피었으며, 특히 H.R.렘브란트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활동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영국 및 프랑스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격렬한 내란으로 국력을 소모한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1810 ∼ 13년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1815년의 빈회의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포함한 저지국의 독립이 인정되었으나, 1830년에 벨기에가 떨어져 나갔고 1839년 양국의
분리 · 독립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는 독일군의 침입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비상사태 때의 약소국의 허약함을 통감하고, 1946년에 벨기에 ·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베넬룩스를 결성하였는데 , 이는 국가연합의
최초의 시도였다. 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맹하였으며, 다른 강국에 의한 안전보장을 받는 대신 해항 로테르담을
EEC의 문호로 개방하였다. 1950년에는 과거 300년간 식민지로서 경영해 온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네덜란드인 처음으로 조선시대에 J.J.벨트브레가 표착하여 귀화하였고,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H.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그 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 파견되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1년 4월
4일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으며, 1968년 12월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이 설치되고 1969년 10월에는 주(駐)네덜란드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양국간의 협정으로는 특허 및 상표 협정(1966), 사증 (査證)면제협정(1970), 항공협정(1970), 투자보장협정(1974년), 이중과세방지협정(1978),
경제 및 기술협력협정(1982), 해운협정(1995)이 있다. 1996년 콕 수상과 1999년 윌리엄 알렉산드 왕세자가 방한 하였으며 1999년
고건 서울시장이 네덜란드를 방문 하였다. 1998년 현재 무역규모는 대(對) 한국 수출은 8억 8,300만 달러이고, 수입은 19억 3,7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제조장비, 디지탈식 직접회로 등이고, 수입품은 데이터 디스플레이,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 승용차
등이다. 1997년 현재 교민수는 415명이고 체류자는 363명이다.
평범한 축구가정서 평범하게 성장
거스 히딩크의 고향은 인구 5만명의 네덜란드 동부 소도시 드틴헴이다.발세벨트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유소년 때 두틴헴으로 이주했고, 21세
때(1967년) 이 지역 프로 팀인 드 그라프샤프에서 첫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현역시절 히딩크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1968~69, 1969~70, 1971~72,1972~73시즌 팀내 최다 득점을 올릴 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현역 선수시절 히딩크는 스피드는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머리가 영리해 독창적인플레이를 펼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히딩크는 1983년에 이 팀에서 은퇴하면서 현역 생활도 함께 접었다. 두틴헴에서 히딩크는 아직도 스타로 대접 받고 있다. 얼마 전 역대 두틴헴
출신 선수 중 최고 플레이어를 묻는 설문에서 히딩크가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거스 히딩크는 6형제 중 3명이 프로축구 선수로 활약했던 축구 집안에서태어났다. 히딩크의 아버지는 본래 학교 교사로 아마추어 축구 팀에서도활약했던
선수 출신이다. 히딩크의 동생인 르네(45)는 1976~77시즌 팀에입단해 거스 히딩크와 함께 형제 선수로 활약했다.
또 다른 동생 카렐(47)도1986~87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드 그라프샤프에서수비수로 뛰며 형의 빈자리를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히딩크를
비롯한 형제들은 축구 선수로서는 최정상급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아내 · 두 아들 네덜란드 고향에 거주
히딩크의 관한 내용 중 가정 문제와 관련된 사생활은 가장 베일에 싸여있는 부분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네덜란드에서도 공개된 것이 극히 일부에불과하다.
공적인 부분과 달리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해주는 네덜란드의 문화 탓도 있지만 히딩크 스스로도 드러내기를 꺼린다.
히딩크의 집은 네덜란드 두틴헴 인근 고급 주택가인 데넨베흐 55번가에는 위치해 있다. 그 곳에는 히딩크의 부인인 이니(55)가 살고 있다.
이니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 미인으로 아직 히딩크와 법적인이혼 절차는 밟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히딩크는 지난해 7월 아내 이니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문상도 가기도 했다. 이니 역시 “ 남편이 한국에서 대표팀을 훌륭히 이끌고 있어 자랑스럽다
” 고 말할 정도로 아직 남편인 히딩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유지하고있다 .
히딩크와 이니 사이에는 미셀(33), 마크(30)라는 두 아들이 있다. 둘째아들인 마크는 아버지 히딩크의 대를 이어 지역 아마추어 클럽인
젤함에서미드필더로 활동 중이다. 두 아들 역시 이번 아버지의 이번 쾌거에 크게고무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형인 한스 히딩크는 최근 TV 인터뷰에서 “ 한국이비록 독일에 분패해 결승 진출은 못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핸 한국 팀은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많이 얻어냈다 ” 며 “ 동생 거스가 한국 국민들에게큰 선물을 안겨줘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다 ” 고 말했다 .
아내와 별거, 20세 연하 애인에 헌신
인간 히딩크를 이야기하면서 흑인 애인 엘리자베스(36)를 빼 놓을 수 없다. 히딩크는 아내 이니와 별거하면서 20세 연하인 엘리자베스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지적인 용모를 가진 엘리자베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엘리트로 알려지고 있다.
연인 엘리자베스에 대한 히딩크의 애정은 끔찍하다. 엘리자베스의 존재가처음 알려진 초기 보도진이 엘리자베스에 접근하자 욕설까지 하면 그녀를보호했던
일화는 아직도 취재진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후 국내 여론에 나빠지자 히딩크는 남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그녀와 밀회를 즐겼다. 히딩크는 가급적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기를 원했고, 떨어져있을
때에도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할 정도로 엘리자베스를 챙겼다.
엘리자베스는 히딩크의 아버지와 경기장을 찾거나 동생 르네와 인사를 하는 것으로 봐 가족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국민들은 ‘ 축구 감독 ' 히딩크를 사랑했고, 그것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히딩크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한국 축구와 우리 국민들에게
안겨 주었다. ‘ 영웅 히딩크 ' 는 앞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