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강이식 (姜以式)은 고구려 병마원수(兵馬元帥)로 597년(영양왕8)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오자 왕이 군신들을 모아 이에 대한 회답을 논의할 때 군신들이 떨며 감히 말을 못하는데, 그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한다 〉고 주장,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30만의 수나라 대군을 요동(遼東)의 임유관(臨楡關)에서 대파하였다. 그 후에도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이끄는 1백만 대군을 격파, 다시 한번 그 기개와 용맹을 떨쳤다.
시조의 묘소는 만주 봉천성 청원현 원수림(淸原縣元帥林)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역인 탓으로 진주시 상봉서동(晋州市 上鳳西洞)의 봉산사(鳳山祠)에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시조 강이식의 6세손인 택인(擇仁)이 서기 839년(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侯)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縉)은 헌강왕(憲康王 : 신라 제49대왕, 재위기간 ; 875 ~ 886)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군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진주는 경상남도 (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청동기시대 유물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변진의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었으며, 가야시대에는 고령가야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백제 때 거열성(居烈城)이었던 진주는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 실시로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가 되어 1주, 11군, 31현을 관할하는 대읍(大邑)이 되었다. 그 뒤 혜공왕(惠恭王) 때에 다시 청주(菁州)로 개칭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청주에서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道)로 개편되면서 진주로 고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현종 3)에 절도사를 없애고 안무사를 두었다가 1018년에 안무사제도를 폐지하고 진주목으로 복구하면서 강성군(江城郡:丹城) · 하동군을 속군으로 , 사주현 · 악양현 · 영선현 · 진해현 · 곤명현 · 반성현 · 의령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한때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싸움 등으로 진주가 정치 · 경제 · 행정 · 군사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아왔다. 당시에는 진주를 진강(晉江) · 청주 (菁州) · 진산 (晉山)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晉州府) 진주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어 도청소재지로서 관찰사가 상주하였다. 1910년에 진주군 진주면(晋州面)이 되었다가 1925년에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진주면이 읍(邑)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38년에는 진주군 도동면(道洞面)과 평거면(平居面)의 5개리, 나동면(奈洞面)의 1개리가 편입되었다. 1939년 도동면 · 거평면을 편입하여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 1949년에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74년에는 진양군 정촌면(井村面) 가좌리(加佐里)와 호탄리(虎灘里), 나동면의 귀곡리(貴谷里)를 이관받았다.
1995년 1월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진주시와 진양군이 합쳐져 도농 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현재 진주시는 구(舊)진주시의 망경 · 강남 · 칠암 · 본성 · 남성 · 대안 · 중안 · 봉곡 · 상봉동 · 상봉서 · 봉래 · 수정 · 장대 · 옥봉남 · 옥봉북 · 상대 1~2 · 하대 · 상평 · 초전 · 장재 · 평거 · 이현 · 판문 · 가호의 24개동과 문산읍 및 내동 · 정촌 · 금곡 · 진성 · 일반성 · 이반성 · 사봉 · 지수 · 대곡 · 금산 · 집현 · 미천 · 명석 · 대평 · 수곡의 15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만 상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 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박사공파(博士公派) : 강계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강사첨(姜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감공파(少監公派) : 강위용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侍中公派) : 강원용을 파조로 하며,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을 지냈다 하여 관서대장군공파로 부르기도 한다.
-은열공파(殷烈公派) : 강민첨(시호는 은열공) 장군을 파조로 한다.
밀직공파 : 부원군 보문의 후손
첨사공파 : 시중 정의 후손
학사공파 : 직제학 원찬의 후손
호부사공파 : 부사 원전의 후손
사평공파 : 판사 정길의 후손
진사공파 : 부윤 원의 후손
-인헌공파(仁憲公派) : 강감찬(시호는 인헌공) 장군을 파조로 하며,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서울 금천구)이므로 금천강씨로도 부른다.
갑파 : 우상 지의 후손
을파 : 대사간 숙돌의 후손
진주강 (姜)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300724가구에 966710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7위이며, 강(姜)씨는 325,288가구에 1,044,386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6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 진주강씨대종회 02-929-0598 서울 -동대문-용두-234-46(2동(3층))
진주 진주강씨박사공파대종회 02-929-0596 서울 -동대문-용두-234-46(2동(3층))
진주 진주강씨사적연구회 02-720-8841 서울 -종로-경운-68-1(4층우송기념관)
진주 진주강씨은열공파대종회 02-929-2014 서울 -성북-삼선동5-272(우남빌딩205호)
진주 진주강씨중앙종회 02-779-0695 서울 -종로-연지-133
진주 진주강씨부산시종친회 051-506-2627 부산 -동래-사직1-66...(진주강씨부산시종회회관)
진주(姜) 초당공파 송월당공후 02-3452-1057 jmkang02@chol.com
경주(姜) 강철수 043-644-732 충북 제천시 서부동 721번지 10통 1반 aassokok@hanmail.net
진주 진주강씨종친회 062-228-3368 광주-동-용산-297-5
진주(姜) 초당공파 송월당공후 02-3452-1057 jmkang02@chol.com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남 , 부산 지방에 가장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진주시 비봉산 아래에 있는 봉곡부락에는 강씨의 번영의 설화를 담은 봉(鳳)바위가 있다. 고려때 영상서(領尙書)를 지낸 정절공(正節公) 강구만(姜九萬)의 집 뒤 대봉산 중턱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기묘하게도 봉의 형상을 하고 있어 봉바위라 불렀는데, 어느날 강남도사(江南道士)가 이곳을 지나다 봉바위를 보고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봉산 산중턱에 시조의 위업을 기리고 영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봉산사(鳳山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