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구성길은 945년 고려 혜종때 나라에 공을 세워 의창군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를
지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창원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나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를 확인할수가 없으므로 후손 구설[具雪]을 1세조로하고 조선 세종때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구종길[具宗吉]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系代]를 하고있다
중시조 구종길의 묘소는 창원군 등면 남산면 구천동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구씨 (仇氏)는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조선 단종 때 장령(掌令)을 지낸
구자평(仇自平), 선조 때 교리(校理)를 지낸 구정열(仇廷說) 등의 이름이
나오지만 선조 이후는 나오지 않으며, 1930년도와 60년도, 75년도 국세조사에서도 보이지 않아 현존하지 않는 성(姓)으로 분류하고 있어 구씨(仇氏)가 구씨(具氏)로 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원은 경상남도 (慶尙南道) 남쪽에 위치하는 산업도시이며 도청소재지로, 삼한시대 변한지역이었고, 삼국시대 금관가야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시대 삽량주 굴자군(屈自郡)이 되었다. 경덕왕 때 굴자군을 의안군(義安郡)으로, 골포현을 합포(合浦)로 개칭하여 의안군에 편입하였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의안군을 금주(金州:지금의 김해)에 속하게 하고 의안 · 합포에 감무를 두었다 . 1282년(충렬왕 8) 의안을 의창(義昌)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개칭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시대인 1408년(태종 8) 의창 · 회원 두 현 (縣)을 합쳐 창원부(昌原府)로 개칭, 승격하여 판관(判官)을 두었고, 1415년 창원도호부로 승격하였다. 한때 칠원현에 합속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분리되었다.
1661년(현종 2) 창원대도호부로 환원하고, 1895년(고종 32) 창원군으로 개칭하였다. 1899년(광무 3) 창원부로 승격하였고, 1903년 창원군이 되었다. 1906년 창원부로 고치고 부윤(府尹)을 두었으며, 진해군 대산면과 칠원군 구산면이 창원부에 편입되고, 진주군의 양전면이 진해군에 편입되었다.
1908년(융희 2) 진해군과 웅천군이 창원부에 합병되고, 칠원군이 함안군에 합병되었다.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정되었고, 1955년 진해읍이 시(市)로 승격하였다.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시책에 따라 기계공업기지 건설을 위해 창원군의 상남면 · 웅남면 · 창원면 일부를 마산시에 편입하여 마산시에서 공단 조성을 추진 , 이듬해인 1974년 공단 일대가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고시되어 공단조성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에는 경상남도 직할 창원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창원지구출장소 관할 전역과 마산시 의창동을 편입하여 18개 행정동으로 창원시가 되었다.
1995년 1월 창원군 일부와 창원시가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고, 1997년 기존의 시 지역 24개동을 12개동으로 통폐합하였다.
2000년 현재 동읍과 대산면 · 북면 및 가음정 · 명곡 · 반송 · 봉림 · 사파 · 상남 · 성주 · 의창 · 용지 · 웅남 · 중앙 · 팔룡동의 1개읍 2개면 12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창원구씨 [昌原具氏]는 원래 구씨[仇氏]였는데 1791년 현재의具씨로 개성[改性]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후손 구자평[具自平]이 조선 단종때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고
자범[自範]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창원 구 (具)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4,391 가구에 14,03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3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305 위이며, 구(具) 씨는 55,540 가구에 178,167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41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 의창군 동면 일원
부산직할시 동래구 복천동
경남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충남 서천군 시초면 일원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
전북 김제군 금구면 대화리
능성 (具) 능성구씨대종회 02-742-6818 서울
창원 창원구씨대종중 02-878-2802 서울 -관악-봉천6-1690...(서광빌라-가-202)
능성 능성구씨부산종회 051-816-5637 부산 -부산진-부전1-127...(성도빌딩4층407호)
능성 능성구씨도원사파범어종중 053-743-1213 대구 -수성-범어2-183-11(도원사파)
능성 능성구씨좌정승공파서무태종회 053-257-4922 대구 -중-포정-21...(중앙상가3층314호)
능성 능성구씨인천종회 032-437-9998 인천 -남-주안4-464...(주안초등학교정문앞)
창원구씨는 원래 ‘ 仇氏 ' 이다 . 구씨성은 능성(또는 능주) 구씨(貝氏) 단일본이었다. 그런데 창원구씨가 조선조 정조때 구씨(具氏)로 사성(賜姓)되면서 또하나의 본이 됐다. 사성이라기 보다 어명(御命)에 의해 개성을 했다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경남 창원의 옛 지명은 신라때부터 인근지역과 합쳤다 갈라지면서 굴자(屈自), 의안, 의창, 회산(會山) 등으로 개칭되어 왔다. 그래서 간혹 옛 지명(地名)을 관향(貫鄕)으로 쓰는 가문(家門)이 있어 이들 지명을 앞세운 구씨는 모두 창원구씨가 틀림없다.
창원구씨의 시조는 구성길(具成吉), 자는 완지(完之)로 고려초에 찬성사(총리급)를 지냈으며 혜종 2년(945)에 의창군에 봉해졌다. 그의 묘소는 강원도 영월에 있다고 전하나 정확하지 않다. 구성길의 아들 희(喜)도 찬성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다.
‘ 仇氏 ' 는 본래 중국 송나라때 대부벼슬을 지내고 치적을 쌓았던 호족 구목 (仇牧)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구씨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없다. 시조 구성길과 아들 희에 대한 관직만 간단히 전할 뿐 400여년의 중간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조선조 초기 인물인 구설(具雪)을 시조로 하고 그의 아들 종길을 중시조로 모신다. 종길은 조선조 세종 4년때 직제학을 지내고 역학에 뛰어났으며 천품이 어질고 온화했다고 한다. 자는 자안(子安), 호는 천곡(川谷)이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면서 벼슬에는 관심이 없어 후배양성에만 전념했다. 그의 문하생들은 줄줄이 과거에 급제했다.
동국여지승람에 그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구종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편모슬하하였는데 어느날 급제하여 돌아온 문하생의 축하 잔치에 초대를 받아 어머니를 모시고 참석했다. 호화스런 잔치를 본 모친 김씨는 아들에게 “ 너한테 배운 사람이 다 급제하여 부모를 영화스럽게 하는데 너만이 응하지 않으니 어쩐 일이냐 ” 고 물었다 .
이에 그는 “ 어머니를 홀로 두고 벼슬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 고 말했으나 어머니의 분부가 엄해 할 수 없이 과거길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 조선조 세종 4년(1422) 가을이었다. 그때 경과(과거의 일종)가 있다고 해 한양에 올라갔으나 과거는 이듬해 봄에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귀향하면 다시는 한양에 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 병조정랑 벼슬에 오른 문하생이 있어 넌지시 부탁을 했다.
“ 위로는 늙은 어머님이 계시고 나는 병이 들었으니 앞으로 한양에 올 길이 없을 것 같네 . 그동안 장안의 성곽(城廓)누대는 두루 구경을 했지만 궁궐은 들어가 보지 못해 한이 되는 구먼 ” 원래 대궐안은 외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비공식으로 대궐구경을 시켰다.
궐안을 두루 살피며 감탄하는 동안 어느덧 짧은 가을해가 칠흑으로 변했다. 하는 수 없이 병조의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따라 경비 강화 어명이 떨어져 제자는 아문(衙門)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청지기를 시켜 주안상을 보내줬다. 대궐안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니 자못 감회에 젖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북소리에 홀려 자신의 위치도 잊고 목적없이 궐안을 더듬었다. 어느 깊숙한 곳에 당도하니 날아갈 듯한 높은 누가와 맑은 연못, 그림같은 다리에 능파정(凌波亭)이 황홀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다. 좌우 층계에는 백화가 뿜어내는 꽃향기로 가득한 후궁화원이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을 때 가을 달빛에 취한 세종대왕도 옥교를 거닐고 있었다.
그래서 시종을 시켜 그를 불러오라 일러 연유를 물었다. 인자한 임금의 용안에는 노여움이 없었다.
“ 저는 영남 창원 사람으로 과거 보러 한양에 왔다가 우연히 여기에 들렀소 . ” 구종길은 상대가 임금인 줄도 모르고 서슴없이 답변했다. 임금은 또 물었다. “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 ”
“ 저는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며 공자의 도를 닦아 평소 과거를 해 이름을 드높일 뜻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 그러나 제자 5, 6명이 잇따라 과거하려 서울에 왔으나 과거가 내년 봄으로 연기돼 내일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입니다.
마침 병조정랑이 내 문인으로 구경을 하게 됐고 그가 순시를 하러 나가 홀로 있자니 쓸쓸해서 바람을 쏘이려 나왔습니다 ” 라며 털어놨다 .
임금은 그가 공자학을 배웠다니 얼마나 아는가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 주역을 아는가 ” 라고 물으니 “ 주역을 연구해 본문을 삼고 조금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라며 구종길은 자신만만해 했다 . 이때부터 임금과 시골 선비의 주역 강론이 시작됐다. 임금이 “ 월색 (月色)은 촛불같이 밝으니 그 역리를 논해보라 ” 고 일렀다 .
이에 구종길은 지지 않고 “ 강론은 어렵지 않으나 존장은 어떤 직품을 갖고 있는 분이요 ” 라고 따졌다 . 임금이 “ 나는 이 땅을 지키는 사람 ” 이라 답하자 그는 “ 문무 (文武)중 어떤 것을 좋아하는냐 ” 고 물었고 이어 “ 존장께서 주역을 알아 뭐에다 쓰겠느냐 ” 고 질책했다 . 끝내 임금은 자신의 지위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향기나는 술 한병과 주역을 가져오라 일러 밤이 깊도록 음양의 이치를 논했다. 임금의 질문에 그는 막힘이 없이 척척 해석했다. 한참을 논하다 임금이 이렇게 일렀다. “ 나는 왕을 시종하는 사람인데 어제 전교를 들은바 있으니 며칠 더 머물렀다가 응시하는게 어떻겠오 ” 라며 주역 한 권을 주었다 .
이때 예조에서 갑자기 정시를 본다는 말이 나붙었다. 구종길은 정시에 응시했다. 이날 나온 출제는 전일 세종대왕과 강론했던 주역의 일부. 열심히 붓을 휘두르고 있는데 곤용포를 바람결에 휘날리며 임금의 거둥이 눈길을 끌었다.
‘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 옳지, 바로 엊그제 달밤에 보았던 그 분이 성상이란 말이냐 ' 고 구종길은 마음속으로 황공하기 이를데 없었다 . 구종길이 장원으로 뽑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찌보면 그를 위해 이번 과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임금의 구종길에 대한 총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필로 내린 첫 직책은 홍문관 정자. 그리고 태학 종묘의 예악 삼헌율과 대전언문 반절문장찬집등을 쓰게 하여 도무지 휴가를 주지 않았다. 벼슬길에 오른지 1년, 고향에 두고 늙은 어머니가 보고파 신경쓰던 나머지 그는 병이 나기까지 했다. 드디어 어명으로 내려진 휴가 20일. 임금이 애용하는 구슬 한 개를 믿음의 표적으로 하사하는 동시에 벼슬도 직제학으로 승진시켜 줬다.
“ 늙으신 어머님이 얼마나 기뻐 하실까 . ” 그가 마냥 뱃사공을 독촉하고 있을 때 “ 잠깐만 배를 멈추시오 ” 라며 뒤따라온 승전관이 배에 오른다 . 승정관이 “ 우리들이 비록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나 주상 (임금)의 목에 걸고 있는 명주(明珠:빛나는 구슬)를 보지는 못했으니 잠시 보여줄 수 없겠오 ” 라고 청했다 . 구종길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부탁이 간곡해 품속에 깊숙히 간직했던 구슬을 꺼내 승전관에게 건네줬다.
그런데 승전관의 눈에서 번득 빛이 나더니 그는 구슬을 깊숙한 강물속으로 던져버리고 백사장으로 뛰어내려 달아나는게 아닌가. 구종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강가에 엎드려 임금에게 대죄(待罪)하기 사흘, 식음을 전폐하고 하늘을 우러려 통곡했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못한 주막집 주인이 다가와 사정을 했다. “ 나으리 , 식음을 전폐한지 여러날이 됐으니 오늘 낚은 고기 한마리를 회로 하여 잡수시요. ” 잉어를 보니 한 자가 넘는다. 못이기는 체 넘겨나 보고 있노라니 잉어 뱃속에서 둥근 물체가 떨어졌다.
분명 임금이 내린 구슬. 구종길은 하늘을 향하여 사례하고 구슬을 귀중히 간직한뒤 귀향길을 서둘렸다. 그는 어머니를 뵙고 기한안에 한양으로 돌아와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인사를 드렸다. 세종대왕의 용안은 자못 엄숙했다. “ 짐이 그대가 갈때 신표로 준 구슬은 그대로 갖고 왔느냐 . ” 그는 다시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구슬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