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금응은 기자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으나 벼슬을 삼한공신 태사를 지낸 금용식의 6세손 까지는 유래를 알수없으며 금용식의 7세손 금의와 금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졌고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김포군 봉화산에 있으며 3월 9월중에 향사한다.
금씨 (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재위기간:기원전 544 ∼ 520)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 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 응(琴 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김포의 별호) · 안동 (安東) · 평해 (平海) · 봉산 (鳳山) · 문화 (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봉화는 경상북도 (慶尙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구려 때 고사마현(古斯馬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옥마현(玉馬縣)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봉성현(鳳城縣), 공양왕 때 봉화현(奉化縣)으로 개칭하여 조선시대를 거쳐 오다가 1895년(고종 32) 봉화군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13년 교통 편의를 위해 군청사를 춘양면(春陽面)에서 내성면으로 옮기고, 1914년 15개면이 9개면 76개리로 개편되었다. 1956년 내성면을 봉화면으로 고치고, 1962년 춘양면 덕구 · 천평 2개 리동이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9개면 1개출장소 72개리로 편성되었고, 1979년 봉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명호면 신라리를 상운면에 편입하고, 소천면 석포리 · 대현리 · 승부리와 울진군 서면 전곡리 일부를 통합하여 석포면을 설치하였다 . 1983년 봉화읍 포저 2리를 리동으로 분동하고, 1990년 봉성면 원둔리를 봉양리로 고쳤다.
2000년 현재 봉화읍과 명호(明湖) · 물야 (物野) · 봉성 (鳳城) · 법전 (法田) · 상운 (祥雲) · 소천 (小川) · 재산 (才山) · 춘양 (春陽) · 석포 (石浦)면 등 1개읍 9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는 고려 명종 때 문과에 올라 고종 때 평장사 (平章事)에 이르렀는데, 당대의 명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 시관을 맡아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는 칭호를 얻었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서 1,561가구로 나타났고, 75년 국세조사에서는 3,319가구로 나타나 인구순위 제82위였으며, 85년 국세조사에서는 4,833가구에 인구 2만 355명으로 나타나 274성 중 제83위였다.
봉화 금 (琴)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6,476 가구에 21,072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 위이며 전체 본관별 인구 순위는 234 위이며, 금(琴) 씨는 7,184 가구에 23,489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82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