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천서는 금성부원군 총례 (聰禮)의
10세손인 윤(允)의 둘째 아들이다.
'안정나씨세보'의 의하면 그는 공민왕때 삼중대광 ·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1370년(공민왕 19) 안정백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안천군에
이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안정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융성을 누려왔다.
시조 나천서가 공민왕 19년(서기 1370년)
동북면 원수 이성계(李成桂)가 요
동의 동녕부를 정벌하고 귀환할 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만오
천여 군사를 진무 나천서(羅天瑞)가 수백석의 양곡을 구하여 무사히 생환시
킨 공으로 안천군(安川君)과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지고 안정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안정으로 삼게 되었다. 선계비고(先系備考)나천서(羅天瑞)
의 부,조(父,祖) 즉 근조(近祖)는 실전(失傳)이다. 그러나 알려진 문헌에
의하면 신라말(新羅末)에 원조(遠祖)가 나오는데, 문헌1 교남지(嶠南誌) 40편\비안편(比安編)\인물편(人物編)에서 신라때 나인(羅認)은
안정인(安貞人)으로 관(官)은 정승(政丞)이고 아들 나천업(羅千業)도 정승으로
문창후(文昌後) 최치원(崔致遠)의 장인(丈人)이다. 총묘편(塚墓編)에서는
나인(羅認)의 묘가 해망산에 있는데, 후손(後孫) 나만갑(羅萬甲)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이묘를 증축 가봉(加封)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정나씨의 원조(遠祖)임을
알 수 있다. 문헌2 비안읍지(比安邑誌) 역시 나인(羅認)은 신라때
정승이고 아들인 나천서(羅天瑞)도 정승으로 문창후(文昌後) 최치원(崔致遠)의 장인(丈人)이다. 라고 되어있어 당시 비안읍지 기록인의 착오임을
누가보아도 알수있는데 나천서는 신라때 정승도 않이며 더구나 문창후 최치원의 장인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나씨에 10世 나 윤(羅 允)이 신라때 정승 나인(羅認)과 동일 인물로 하여 나천서를 장남으로한 삼형제를 둘째로 끼워 맞추어 사형제를 만들어
놓고 안정나씨(安定羅氏)와 상산백(商山伯)과 군위나씨(軍威羅氏)가 ○○ 나씨에서 계출(系出)하였다하며 세계표(世系表)를 제작 배포하고 있다.
이로인하여 문중 상호간에 불신과 반목으로 위선사에도 도움이 않되니 당해 문중에서는
하루속히 이를 시정해야 할 것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의 옛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아시혜 (阿尸兮) 또는 아을혜(阿乙兮)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때
안현(安賢)으로 고쳤으며 고려조에 와서 안정현(安定縣)또는 安貞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세종조에 안비현(安比縣)으로 하였다가 그후 비안현(比安縣)으로 고쳤다
공민왕 19년 이성계가 요동를 정벌하고
귀환할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만오천여 군사를 나천서(羅天瑞)가 수백석의 양곡을 구하여 무사히 생환시킨 공으로 안천군과
안정백에 봉해지고 안정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안정으로 삼게 되었다.
나씨의 인물로는 천서의 현손 유선[裕善]이 양산군사를 지냈고 맏아들 계종[繼宗]은
한성부 참윤을, 둘째 연종[連宗]은 청산 현감을 지냈으며 막내 사종[嗣宗]은 선전관이 되었다
조선 선조때 윤침[允沈]의 아들 급[級]은 평산부사를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만갑[萬甲]의 공으로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만갑은 인조때 형조참의와 공조참의를 역임했으며 만갑의 5대손 열[烈]과 걸[杰]이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