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 문무왕(문무왕:
제 30대 왕, 재위기간: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淸州)로 개칭되었다. 고려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2세 숙[淑]이 진녕부원군에, 3세 돈식(敦植)은
진원부원군에, 4세 홍림(洪林)은 평장사를 거쳐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홍림의 아들 [부]는 진흥부원군, 손자 [간]은 진성군에 봉군되어
6대(代)가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외에도 조선 세조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문통(文通)이 사간을 거쳐 상주목사를 지냈으며 [청천유고]를 저술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
인귀(仁貴)와 막내 인숙(仁淑)이 뛰어났다.
그밖의 인물로는 조의(祖誼)의 아들 진(縝)이 형조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을 거쳐 태천, 단천, 평창 등지의 군수를 지냈으며, 선조때의
명신 근(根)은 호성이등공신으로 진원부원군에 봉해지고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에 올랐으나 광해군때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구는 근(根) 의 손자로서 진주군에 봉해졌으며, 영(潁)의 아들 명견(命堅)은 숙종때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우 명천(命天)은 숙종때 예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나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했다는 무고로 아우 명현(命賢)과 함께
지도(智島)에 귀양갔다 돌아와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류씨(晋州柳氏)는 남한에 총 17,667구,
72,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