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어화인 (魚化仁)은 중국 빙익현
사람으로 중국 남송 때 난을 피해 1195~1197년(고려 명종) 사이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화했으며 명종 때 인장동정을 지냈다. 그는 우리나라
강원도 강릉으로 들어와서 정착해 살았었으나 다시 평안남도 함종현(강서군)으로
이사해서 살면서 본관을 함종으로 하였고 다시 진주로 이사해서 살았다고 한다.
함종 어씨 (咸從魚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풍익현(馮翊縣) 출신인 어화인(魚化仁)이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해 강원도 강릉부(江原道江陵府)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다시 평안도 함종현(平安道咸從縣 : 지금의 강서군)으로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고려 명종(明宗)때 인장 동정(仁長同正)을 지낸 어화인(魚化仁)을
시조로 하고 함종(咸從)을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은 함종(咸從) · 충주 (忠州) · 경흥 (慶興)의 3본이 전하지만, 대부분
함종어씨로 알려져 있다.
함종어씨의 시조 어화인(魚化仁)은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해 강릉(江陵)으로 왔다가 함종(평남 江西郡)에 정착 · 귀화하였다고 한다 .
한편 충주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는데, 겨드랑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어씨로 사성(賜姓)했다는 전설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충주지씨(忠州池氏)와 동족이성(同族異姓)이 되는 셈이다.
함종 (咸從)은 평남 강서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오랫동안 황혜하였던 것을 고려때 함종이라 개칭하여 현령을 두었다.
조선조 1914년에 강서군과 합하여 지금은 강서군에 속한 함종면으로 남아있다.
함종 어씨의 중흥 인물인 변갑 (變甲)은
현령을 지낸 연(淵)의 다섯 아들중 맏아들로서
조선 세종때 명신으로 이름났다. 그는 성균관 주부를 거쳐 좌정언, 우헌납을 역임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안으로 돌아가 노모봉양에 진력했다. 특히 그는 평소에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과 친하여 "우리가 충성껏 임금을 섬기고 이름이 이룩되면 고향에 돌아가
노친을 봉양하자. "고 약속한 바 있었다
변갑의 아들 효첨(孝瞻)은 검열을 거쳐 집현전 교리가 되어 젊은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446년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했다.
세조때 이조 판서에 오른 그는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부사로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효첨에게는 세겸(世謙),세공(世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세겸은 각 조(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봉상시 녹사를 거쳐 박사를 지낸후 이조정랑과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특히 학문과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다.
세공의 10세손 유봉(有鳳)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유(巨儒)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문하에서 이천보, 홍상한, 윤득관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경종의 국구(國舅)인 아우유귀(有龜)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이밖에 인물로는 정조때 도총관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른 석정(錫定)과 훈련원 주부, 판관,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재연(在淵)이 유명했고, 한말의 개화파 대신 윤중(允中)은
독립운동가 윤희(允姬)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종 어씨는 남한에 총 2,687 가구, 10,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김포군 하석면 석탄리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봉비리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충북 중원군 주덕면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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