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건 (王建)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사재(私財)를 털어 차(車) 1천 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올랐으며,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차로써
목적을 달성)>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시조 차달의 두 아들 증 장남 효전 (孝全)은
본성 (本姓)인 차씨(車氏)를 잇게하여 종적(宗籍)을 연안(延安)으로 하게
했으며, 차남 효금(孝金)에게는 류씨(柳氏)를 계승하고 본관(本貫)을 유주(儒州)로
하였으나 지명의 변천으로 유주가 문화(文化)로 개칭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류씨(柳氏)는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후예(後裔)로
전하며, 후손 신갑(辛甲)이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요수(遼水)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평양(平壤)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隱居) 하면서 <일토(一土)>를
따서 왕씨(王氏)로 변성하여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고치고 단군왕조(檀君王朝)에서
치민장(治民長)이 되어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25세손 수긍(受兢)은 기자조선 말엽에 사사(士師)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의
의관법도(儀官法道)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평양을 버리고 남천하여 마한(馬韓)에
은둔하였는데, 당시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나라안에 떠돌자 이를 두려워한 기준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긍(受兢)의 34세손 왕몽(王蒙)이
아들 8형제 중 일곱째 아들 임을 데리고 지리산(智異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姓)을 세번 변성하여야 후손들이 크게
번성한다고 계시(啓示)하자 왕(王)자 의 변형인 전(田), 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바꾸고 자기 이름을 무일(無一)로, 아들 임은 신을(神乙)로
고쳤다. 그후 무일(無一)의 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 좌상(左相)으로 국정(國政)을 다스리다가 809년(헌강왕 1) 병부령(兵部令)으로
있던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헌강왕(憲康王)이
되므로 전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헌강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묵방동에 은신하고 조모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柳)로 고치고 이름을 색(穡), 아들은
숙(叔)으로 고쳤다. 색(穡)의 6세손 해(海)가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이차위달(以車爲達:차로써
목적을 달성)>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고
한다.
문화 (文化)는 황해도 신천에 속한 지명으로
본래 단군시대의 당장경이었다.
그후 고구려때 궐구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초에 유주로 개칭하였고 고려 고종때 문화현으로
승격하여 조선때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895년(고종 32) 신천군에 편입, 문화면이 되었다.
문화류씨의 인맥으로는 소감 총 (寵: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 )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 언침(彦 )의 후손에는 판관 안택(安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조에서 20년간 벼슬하였고, 조선이 개국된후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35년간을, 도합 55년동안 주요관직을 지낸 현신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그는 우의정에 오를 때까지도 동대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초가에 살며 청백함으로 역사를 수놓았다.
관(寬)의 아들중 계문(季聞)은 세종때 판한성부사와 형조판서를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권은 참판을 지내고,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때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부자정승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 성오의 아들로 대사간과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141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정현(廷顯)은 문화공 진(鎭)의 아들로 세종이 즉위하자 삼군도통사로 일본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으며
1426년다시 좌의정에 이르러 치사한 후 4일만에 죽었다.
사육신(死六臣)으로 유명한 성원(誠源)은 세종때 급제하고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공(思恭)의 아들 순(洵)은 연산군때 영의정으로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문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시부에 뛰어나 왕명으로 서거정, 노사신
등과 함께 연주시격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인종때 좌의정을 역임한 관(灌)은 태조때의 우의정 양 (亮)의 6세손이며 장령 정수(廷秀)의 아들로서 소윤이 일으킨 을사사화때 정순붕의 탄핵을
받아 서천으로 유배도중 과천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권신 윤원형의 세도에 아부하여 윤임 일파를 제거시키는데 성공한 정순붕은 관의 가족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았는데, 갑이(甲伊)라는 관의 여종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수를 하였다는일화가 유명하다.
류씨의 유래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류차달의
아들 효금 [孝金]으로부터 번성한 후손은 6개의
본관으로 분적되는데
류차달의
10세손 자성[資成]이 풍산류씨로
10세손 성간[成澗]이 서산류씨로
10세손 양재[良梓]가 전주류씨로
10세손 인비[仁庇]가 진주류씨로
13세손 해 [해]가 선산류씨로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화류씨(文化柳氏)는 남한에 총 63,885가구,
267,9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