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진필명 (秦弼明)으로 당나라 고종조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필명은 624년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지용과 지기가 뛰어났으며, 660년 소정방 등과 함께 나당 연합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를 공략, 멸망시켰고
신라에 귀화하여 우리나라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풍기진씨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본관은 풍기 (豊基) · 삼척 (三陟)
· 용인 (龍仁) · 영춘 (永春) · 평강 (平康) · 남원 (南原) 등이
있는데, 도시조(都始祖)는 진필명(秦弼明)이고, 여러 본관은 풍기진씨의 분파로
알려져 있으며, 문헌에는 중국 원(元)나라에서 귀화한 제주진씨(濟州秦氏)가
따로 있는 기록도 있다.
필명의 15세손 질명이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정중부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기주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들의 후대에서 삼척과 영춘파로
분적되었다.
《풍기진씨세보(豊基秦氏世譜)》에 의하면 시조가 기자릉을 배알하고 그곳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하였으며, 또 태원은 지금의 충주의 동쪽이라 되어
있어 시조가 처음 정착한 곳은 평양이요, 봉지를 받은 곳은 충주인데 본관을 어떤 연유로 풍기로 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상북도 (慶尙北道)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을 고려초에 기주(基州)로 고쳐 길주(吉州 :
안동의 옛 지명)에 예속시켰다가 서기 1390년(공양왕 1) 은풍현(殷豊縣)을
병합하였으며, 조선 예종(睿宗) 때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하여 오다가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豊縣)에 봉안(奉安)하고는 은풍(殷豊)과 기천(基川)을
합하여 풍기(豊基)로 고쳤다.
풍기 진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가문을 빛냈는데 , 그중 대표적 인물로는 보승장군 원의 아들 효정(孝貞)이
봉승랑을 거쳐 중문지후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중길(中吉)이
통직랑을 지낸 후 계림 판관이 되어 명망높은 풍기진씨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무성군 예남의 후손인 재해는 1713년 어용모화도감의 화공이 되어 숙종의 전신을 그려 상을 받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는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했으며 후에 첨절제사를 역임하여 훌륭한 풍기 진씨 가문을 빛냈다.
이 밖에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동익 · 동석은 , 독립운동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학신과 더불어 명성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기진씨는 남한에 총 2,392가구, 9,8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예천군 하리면 송월동
경북 영풍군 봉현면 노좌리, 생현리
경남 거창군 거창읍 일원
경북 의성군 청호동
제주도 일원
본관은 풍기 (豊基) · 삼척 (三陟)
· 용인 (龍仁) · 영춘 (永春) · 평강 (平康) · 남원 (南原) 등이
있는데, 도시조(都始祖)는 진필명(秦弼明)이고, 여러 본관은 풍기진씨의 분파로
알려져 있으며, 문헌에는 중국 원(元)나라에서 귀화한 제주진씨(濟州秦氏)가
따로 있는 기록도 있다.
시조 필명은 당(唐)나라 때 타이위안[太原] 출생으로 고종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서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나 · 당연합군으로 백제를 무찌른
뒤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태원백 (太原伯)에 책봉된 것이라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 초기에 경(勁) · 정 (靖) 등이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고, 고려시대에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관유(寬裕),
좌정승을 지낸 계춘(繼春)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예의를 지낸 유경(有經), 중종 때 동래부사를 지낸 연(淵), 선조 때 정우(正宇)를
지낸 명홍(冥鴻) 등 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따르면 모두 1,852가구로 그 중 392가구는 제주도에 있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7,960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9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1만 6435명으로(가구수 3,953가구)
274성 중 제90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