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宋)나라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고려 인종(仁宗) 때 가솔(家率)을 이끌고 함흥(咸興)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였다.
추적의 할아버지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 연화도에 있으며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본관은 개성 (開城) · 강화 (江華)
· 파평 (坡平) 등이 문헌에 있으나 오늘날에는 추계(秋溪:陽智) 추씨 단본으로
되어 있다.
시조 추적(秋適)은 고려 충렬왕 때 사람으로 민부상서(民部尙書) · 예문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 (門下侍中)에 오른 명신(名臣)이다.
《명심보감》의 편자로도 알려져 있다.
추계 (秋溪)는 경기도 양지를 말하며
본래 수주양량부곡인데 1399년 처음으로 양지라 명하였다.
1895년(고종32) 군으로 승격하고 1914년 용인군에 병합하였다.
추씨구백년사 (秋氏九百年史)에 의하면
엽의 아들 황(簧)이 1209년 성균시험에 장원하고 12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황의 아들 적(適)은 문장에
뛰어났고, 민부상서,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항 후 시랑 겸 국학 교수에 이르러
명심보감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이부시랑 천일(天日)의 아들 수경(水鏡)은 명나라에 건너가 무강자사(武康刺史)에 재임중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병으로 이여송의 부장(副將)이
되어 아들 노(蘆), 추(萩)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곽산, 동래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때 전주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추씨는 적(適)의 후손 익한(益漢)이 세종때 한성부윤을 지내고 향리로 돌아가 시서(詩書)로 자락(自樂)하다가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오자 머루, 다래 등을 따다 바치며 충성을 다 하였다. 1457년 단종이 살해되자 그도 따라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秋忠臣)이요 죽어서는 엄충신(嚴忠臣)>이라고 일컬었으며, 지금도 영월에 있는 영모전에는 그의
충성을 기려 백마를 탄 단종의 혼백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한말에 와서는 7의사의 한 사람이었던 치경(致鏡)이 충주 장현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충절의 가풍을 이었으며, 용만(鏞滿)과
용소(鏞召) 형제는 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다 순국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1960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2만 916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64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만 1620가구, 4만 8626명으로 274성 중 제65위였다.
전주 22,136명, 추계 21,416명, 양지 863명이 있다.(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