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말 (속末) 출신이며,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의하면 중상(仲象)은 천문(天文), 지리(地理)와 병법(兵法)에 능통(能通)했으며,
서기 696년(당나라 중종 사성13, 신하 효소왕5)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東北)으로 본거(本據)를
옮겨 말갈(靺鞨)과 통합(統合)하여 진국(震國)을 세웠다.
-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 조천리에 있다.
중상 (仲象)의 18세손
집성(集成)이 고려 고종(高宗)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1231년(고종18) 몽고군(蒙古軍)이 내침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격파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협계군(陜溪君)에 봉해지고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집성(集成)을 중시조(中始祖:일세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협계(陜溪)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협계 (陜溪)는 황해도 신계군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 수곡성이라 하다가 통일 신라 때인 758년에
단계현으로 고쳤다. 그러다가 940년(고려 태조23)에 협계로 고쳐져 곡주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1396년 신은현에 통합하기까지 그 지명이 지속되었다.
그후에 감무를 두었던 신은현과 협계현의 지명을 한 자씩 따서 신계군이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집성의 아들
정취 (貞就)가 충렬왕때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손자 영재(永財)는 문하시랑에
올랐고, 판병부사를 지내고 청성군에 봉해진 경후(慶後)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에서는 판병부사를 지낸 경후(慶後)의 아들 응진(應辰)이 정종때 담양 도호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 이(異)는 훈련원
참군, 함평현감,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형조참판을 지낸 맹인(孟仁)과 직제학을 역임한 맹의(孟義), 통정대부에 오른 우림(雨霖) 등이 유명했으며, 일민(逸民)은
승사랑을 지내고 숙종때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추증되어 용양위 부사과를 지낸 희(熙),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윤민(潤民), 부총관을 지낸 홍묵(弘默),
상주(相周), 학두(學斗), 중추부사를 역임한 석항(碩恒) 등과 함께 명문 가문을 빛냈고, 효자 원풍(元豊)과 학자 언중(彦中)이 선조의
위업을 받들어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협계태씨(陜溪太氏)는 남한에 총 258가구, 1,1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북 옥구군 성산면 고봉리
전북 임실군 임실읍 정월리
전북 남원군 주천면 신촌리
전북 임실군 운암면 일원
본관은 협계 (浹溪)를 대종(大宗)으로
하고 그 밖에 영순(永順) · 밀양 (密陽) · 남원 (南原) · 통천 (通川)
등이 전해진다.
협계태씨는 주(周)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도 하고, 기록상에는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예라고도 한다.
발해의 왕성(王姓)이라면 대씨(大氏)이므로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당하던 무렵 고려에 귀화하여 태씨로 변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화(投化), 태조로부터 왕계(王繼)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역사상 대표적 인물은 조선시대 두남(斗南)으로, 그는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또 구련(九連)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를 만든 사람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에는 총 1,043가구가 있었는데 그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특히 478가구가 집중되어 있던
점으로 미루어 북방에서 이주해 온 씨족의 후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 통천태씨 중국투화인 (通川太氏中國投化人) ' 이라 나와 있는 점으로도 발해 유민의 후예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4,333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11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795가구로 274성
중 제112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