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다.
변씨는 원래 중국 주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이 처음 조 (曺)로 봉해졌다가 후에 노나라 변읍에 봉해지자 성을 변이라
했다. 그후 후손 변원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예부상서에 오르고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 한질을 가지고 신라 경덕왕때에 사신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았으나 그후의 대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고려 성종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초계)군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있다.
초계 변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고려때 국자진사가 되고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하는 밀양 변씨도 같은 변정실의 후손으로
대종회를 같이하고 있다.
경상남도 (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 (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첫째
장파 (長派)에서는 시중 광의 8세손 남룡(南龍)이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판윤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직산에 은거한 후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아들 7형제가 현달했다.
장남 혼은 사복시 주부을 역임했고, 둘째 순(純)은 홍문관 교리을 거쳐 연안 부사로
아우 [타]는 장흥 부사로, 굉(紘)은 참판을 지내서 이름을 떨쳤으며,
다섯째 아들인 효문(孝文)은 직제학을 거쳐 첨지중추원사로 일본에 다녀왔고,[오례의주]를
상정(詳定)했으며 [신주무원록]을 편찬했다.
한편 효문의 증손 형량(亨良)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장에 유배되었다가 효수 당했으며,
승세(承世)의 아들 훈남(勳男)은 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연안공 순(純)의 증손 준(雋)은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정국사등공신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라 초계군에 봉해졌으며, 참봉 유청(惟淸)의 아들
시민(時敏)은 남원 영장을 역임했고,
유명(惟明)의 아들 시환(時煥)은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조 정실이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인 중파(仲派:밀양 변씨)에서는 공양왕때 호조,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로 검교판중추원사에 올랐던 옥란(玉蘭의
아들 3형제가 대표적이다.
이조판서를 역임한 맹량(孟良:옥란의 맏아들)의 아들 필상(必祥)은 좌승지를 지냈으며,
이원계(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가 된 중량(仲良)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화을 입었다. 계량(季良)은 옥란의 막내아들로 20여년간 대제학을 지내며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특히 그는 문장과 시에 뛰어나 당대의 제1인자로 손꼽혔으며 후세의 야사[野史]에 많이
오르내린다.
한말에 와서는 상태[相泰],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영만, 영태, 영로 3형제는 학자로 이름을 려
한국의 3소[三蘇]라 불렸다.
오늘날 변씨는 경상남북도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중 합천군 일대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시조의 맏아들 광 (光)의 후손인 장파가
변씨일문의 6할을 차지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에 많이 살고,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 중파는 경상도 지방에,
막내 휘(輝)의 후손인 계파는 합천군을 중심으로 집중 세거하며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