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호진 (薛虎珍) 또는 설거백(薛居伯)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 · 물천 (勿川) · 동산리 (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본관은 경주 (慶州) · 순창 (淳昌)의
2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거백(薛居伯)은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의 촌장들 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 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씨는 설거백(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라벌 (徐羅伐)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 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
습비부가 경주에 속하므로 본관을 경주로 하고, 시조를 설지덕(薛支德)으로 하였다. 36대손인 설자승이 고려 인종때 예부시랑으로 순화(순창)백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바꾸었으나 설귀창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경주 (慶州)는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사로,
사라로 하고, 수도를 금성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로 하였고,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낙랑군, 계림부, 경주부 등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이 되었으며, 1955년에는 경주시가
되었다.
설씨는 회골계의 후예가 설련하 ( 輦河)에
세거하면서 성을 [설]로 삼게 되었다고 하며,
원나라 태부인 극직(克直)의 6세손 설문질( 文質)이 원조에서 참지정사를 지냈다는 기록이전한다. 그후 설문질의 손자 설손( 遜)이 원나라
순제때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단본당 정자로
있으면서 황태자에게 [경전(經典)]을 강론했으나 승상의 비위에 거슬려 단주유수로
좌천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대령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1358년 고려에 망명하자 공민왕은 원나라에 있을때부터
친히사귄 친구사이므로 그를
부원후에 봉하고 논과 밭을 내려주어 우대하였다.
이듬해 아들 5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화하여 맏아들 장수(長壽)가 공양왕때
정난공신으로 판삼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가 화를 입을 때 그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태조에 의해 풀려나와 검교문하시중에 복직, 연산부원군에 봉해지고
계림을 사적받아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게 되었다.
장수는 안렴부사을 역임한 아우 경수(慶壽), 미수(眉壽)와 함께 가문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18세로 문과에 급제한 미수는 태종때 호조와 병조의 전서를 거쳐 전후 다섯차례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조의 판서를 지내고 검교우참찬에 이르렀다.
순(循 : 경수의 아들)은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세종때 인동현감을 지내고 왕명으로 [효행록]을 증수했으며 집현전 부제학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수했다. 역사에도 정통하였으며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고, 윤회등과 함께 [통감훈의]를 저술하여 더욱 학명이 떨쳤다.
도시조는 신라의 6촌(村) 중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習比部)의 장인 호진공(虎珍公)이다.
신라의 3대 유리왕(儒理王) 때 6촌의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되었으므로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 남동단에서 살아온 선주민의 후예로 생각된다.
역사상 최초의 설씨는 신라 진평왕대와 신문왕대의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이다.
경주설씨의 시조는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薛聰)이며, 순창설씨의 시조는 총의 증손인 인손(仁孫)이다.
순창설씨는 인손이 그의 처향(妻鄕)인 순창으로 분적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서 태어나 국학(國學)을 크게 진흥시켜 ‘ 신라 10현(新羅十賢) ' 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고
, 강수(强首) · 최치원 (崔致遠)과 함께 ‘ 신라 3문장(新羅三文章) ' 으로 불리었으며 ,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고려 때의 주요인물로는 고종 때 추밀원 부사를 지낸 신(愼), 그의 아들로 충렬왕 때 찬성사 · 중찬을 지낸 공검 (公儉)과 평장사를 지낸
인검(仁儉) 형제, 인검의 아들로 충렬왕 때 정승을 지낸 지충(之沖)과 명의로 이름을 떨친 경성(景成), 그리고 판삼사사 · 찬성사를 지낸
영임 (永任) 등이 있다.
조선 세종 때 대사성에 오른 위(緯),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우고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진 계조(繼祖)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