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손씨 (慶州 孫氏)는 신라의 전신(前身)인
서라벌(徐羅伐)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봄 왕 (王)으로부터 손씨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하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신라 흥덕왕(興 德王) 때의 손 순(孫 順)을
손씨의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경주는 경상북도 (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 · 발전하였는데
,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도 역할을 하였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2000년 현재 하양 · 진량의 2개 읍, 와촌 · 자인 · 용성 · 남산 · 압량 · 남천의 7개 면, 중앙 · 중방 · 북부 · 남부
· 서부 · 동부의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경원의 증손 손사성 (孫士晟:)이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손욱(孫旭)과 손소(孫昭)의 형제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손소는 1459년(세조 5년)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고 주부(主簿)와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한 후 형인 영북 어사(嶺北御史)
손욱과 함께 이시애의 난 때 평정에 참여하여 손욱은 함흥에서 순절하였고, 그는 난을 평정한 후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와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며
특히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손소의 둘째 아들로 탁월한 문장과 경륜(經倫)에 밝았던 손중돈(孫仲暾)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489년(성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시작으로 여러 청환직(淸宦職)과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라 연산군의 폭정으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날 때 파직당했으나 중종반정 후에 복직,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의 공덕을 추모했으며, 1517년(중종 12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工曹)와 이조(吏曹) 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도승지(都承旨)를 3번, 대사간(大司諫)을 4번, 경상, 전라, 충청,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외 정언(正言)을 지낸 손회종(孫會宗), 부사(府使) 손만웅(孫萬雄), 현감(縣 監) 손경익(孫景翼), 감찰(監察) 손회경(孫會慶),
이조 좌랑(吏曹佐郞) 손병주(孫秉周),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손상일(孫相馹), 손기영(孫耆永) 등이 유명했고,
손번(孫蕃)은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편수사(編修事)가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손윤원(孫潤源)은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창암(倉巖)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으며, 손영곤(孫永坤)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손종로(孫宗老)는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허완(許完)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이천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순절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고 정조 때 왕명으로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그밖에 진해 현감(鎭海縣監) 손식(孫湜), 부사(府使) 손종책(孫鍾策), 군수(郡守) 손병수(孫秉秀) 등이 경주손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손씨 (慶州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57가구, 81,5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일원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항리, 오포면 능평리"
강원도 원주시 일원
충남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안강읍 육통리
경북 경주시 천북면 성지리, 화산리
경북 경주시 내남면 율동리, 상신리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인동리
경북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 유금리, 단구리
경북 경주시 일원
경북 영일군 죽장면 상옥리, 매현리, 합덕리
경북 영일군 기계면 일원
경북 영풍군 장수면 호문리, 반구리
경북 영풍군 이산면 신천리
경북 의성군 춘산면 영계동, 사곡면 신감동
경북 예천군 풍양면 와룡리, 용문면 일원
경북 영천군 임고면 효동, 대창면 강회동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동, 소보면 송원동
경북 상주군 청리면 율리, 공성면 거창리
경북 문경군 동로면 마광리, 영순면, 율곡리
경북 안동군 길안면 대곡동, 서후면 광평동
경북 봉화군 봉화면 도촌리 �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경남 밀양군 단양면 사연리
평북 정주군 남서면 일원
경주 (孫) 경주손씨종친회 02-2264-1343 서울
-중-을지로6-17...(거평프레아21층19호)
밀양 전국밀양손씨종친회 02-763-4402 서울 종로 -창신-293-5(4층)
경주 경주손씨부산종친회 051-634-9682 부산 -동-범일2-830-24(자유시장4층436호A)
일직(孫) 부산일직손종친회 015-207-4987 부산 사하구 하단
1동 608-27 삼광하이트빌라 102호 design@cultad.com
경주 경주손씨종친회 054-773-7889 경북 -경주-성건-349...(3층)
밀양 밀양손씨세보편찬위원회 054-332-8887 경북 -영천-창구-26...
월성 월성손씨문천재사종중 054-872-6203 경북 -청송-현서-모계-485...
밀양(孫) 밀양 전국밀양손씨종친회 011-868-2200 hanv2k@hanmail.net
손씨는 문헌에 11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9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손씨중 일직(안동) 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의 손자 손직이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손씨로 성을 하사 받아서 생겼으며 일직(안동) 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주, 밀양, 월성, 청주, 평해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인 손순(孫順, 자는 사구, 호는 문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일찍이 아버지 손학산(孫鶴山)을 여의고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린 아들이 늙으신
어머니 운오(運烏)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아들은 다시 낳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한번죽으면 다시 모실 수가 없는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이 굶주리니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겠소"하며 아내와 의논을 해서
어린 아들을 취산(모량리 서북쪽에 있다.)으로 데리고 가서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돌로된 종이 나왔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무에 걸어 놓고
두들겨 보니 소리가 은은 했다.
아내가 "이 종을 얻은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으면 안 되겠습니다."하며 아들과 돌로된
종을 가지고 돌아왔다. 종을 집의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소리가 대궐까지 들려서 흥덕왕이 "서쪽에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들리니
보통 종이 아니니 조사해 보라"고 하자 신하가 조사해 보고 왕에게 그사실을 아뢰었다.
왕이 "옛날 한나라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그 효행에 감탄하여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쌀 50석을 하사 하여 효성을 숭상
했으며 835년(신라 흥덕왕 10년)에 월성군에 봉했다. 이에 손순이 원래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돌로된 종을
모셔 두었다. 그후 신라 진성여왕 때에 후백제의 침입으로 절과 종은 없어지고 절터만 전해지고 있다. - (참고: 삼국유사)
-시조 손순의 묘는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효자동에 있고 향사는 음력 10월 1일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