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송순공 (宋舜恭)은 신라 때 대아손을
지냈으나 그후 240여년간의 후대는 알 수가 없으므로 후손인 송인(宋仁)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송인은 고려때 평장사로 상산(진천)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진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 송인의 묘는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두여지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진천 송씨 (鎭川宋氏)는 당나라 호부
상서(戶部尙書) 송주은(宋柱殷)의 7대 손 송순공(宋舜恭: 신라 때 대아찬을
역임)의 후손으로 전하나 계대가 불명하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손 인(仁)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다. 1125년(인종 3)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한 인(仁)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거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진천(鎭川)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진천 (鎭川)은 충청북도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때 금물노군 또는 만노,수지,신지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시대에 흑양군 혹은 황양이라 하였다. 고려초에 와서 강주로 개칭되고 뒤에
진주로 하였다가 1413년(태종 13) 진천으로 개명하여 하였다
진천송씨 (鎭川宋氏)는 당나라 호부 상서
송주은(宋柱殷)의 7대손 송순공(宋舜恭)의 후손으로
전하나 계대가 불명하여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후손 인(仁)을 1세조로 받들고 있다.
1125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한 인(仁)은 일찌기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거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아 찬화공신에 오르고 삼중대광에 이르러 진천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진천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인의 아들 원겸(元謙)이
벼슬이 은자광록대부 삼중대광으로중서문하평장사,상주국에 이르러 명재상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후 인의 손자 순(恂)이 평장사를, 희(憘)는 전리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고,
순의 아들 언기(彦琦)는 금주 현령과 감찰어사 등을 지내며 명어사로 이름을 떨쳤으며
방어별감과 대장군을 지낸 아우 언상(彦庠)과 함께 가통을 지켰다.
한편 전리판사 희(憘)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유의(由義)는 충렬왕때 안동부사를 거쳐 합문지후를
지냈으며, 차남 유신(由 信)은 밀직사 대언을 지내고 합문지후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간의대부를 거쳐 한림원사에 오른 맏아들 징(徵)은 첨의시랑에 이르렀으며,
차남 소는 문하평리와 안성군수를 역임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광보(光輔)의 아들 반(盤)이 예빈시 소윤을 지내고 회양 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부사 우(愚)의 둘째 아들 익(翼)은 개성도사와 군수를 역임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찬(贊)은 경기도 관찰사와 우찬성을 역임하고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의 4왕조에 걸친 중신으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의 삼등공신 영망(英望)과 임진왜란때 순절한 주빈이 유명했고
응일(應一)의 아들 도남(圖南)은 정묘호란때 적과 맞서 싸우다가 온몸에 빈틈없이 화살이
꽂힌채 성첩(城堞)을 벼개삼아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안주 충민사에 제향되었다.
석후(錫後)의 아들 도함(道涵)은 숙종 때 인현왕후의 폐비문서를 처리해야 했던 입직사로서
입었던 조복을 찢고 궁을 도망쳐 귀향했고, 백순(伯純)의 아들 입(笠)은 이 괄의 난에 공을세워
원종공신으로 보성군수를 지내고, 병자호란에는 죽산부사가 되어 남한산성을 수비한 공으로
재령 군수로 나갔으며 장수산성을 축조하고 돌아와 한성부 우윤과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순현(順鉉)은 삼화 현령을 지낸 진(震), 승정원 좌승 섬(暹),
공조판서를 거쳐 좌찬성과 대제학에 추증된 창(昌), 적성 현감 수옹(秀雍), 홍산 현감 의손(宜孫), 나주 목사 택휴(宅休) 등과 함께 의절의
가문인 진천송씨를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