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 의하면 그는 여산 송씨의 시조인 송유익(宋惟翊)의 후손으로 전하나 상계(上癸)를 고증(考證)할 수 없고, 누대(累代)로 양주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사족(士族)의 후예인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원향(原鄕)인 양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도성(道成)의 증손 효지(효智: 이권의 아들)가 조선 초에 그의 아들 희주(希周)와 함께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으며, 참봉(參奉) 덕림(德林)의 손자 순령(舜鈴)이 직장(直長)을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영조(英祖)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동윤(東胤)은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지내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한 후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치적(治績)을 남겼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호(永祜)와 재호(在祜)가 뛰어났는데, 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김창숙(金昌淑) 등과 더불어 만주와 몽고 지방에서 개간사업을 일으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영호(永祜)는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결의하고 국내로 돌아와 자금을 모으다가 피체되어 3년 간 옥고를 치루었으며, 재호(在祜)는 독립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면도칼로 목을 잘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수개월간 입원치료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양주 송씨의 가맥을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