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공족 (公族)의 후예로 고려조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고종(高宗: 제22대 왕, 재위기간: 1213 ∼
1259)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고령 신씨의 시조 신성용 (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조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고종(高宗:
제22대 왕, 재위기간: 1213
∼ 1259) 때 문 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 었고,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영남 지방의 벌족으로 일컬어졌다.
고령은 경북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인데 757년(경덕왕)에 고양군
되었고, 그후 조선 태종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이라 하였으며,
1895년(고종)에 성주 9면과 현풍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이 되었다.
시조의 현손대에 와서 덕린이 고려말에
좌사의대부와 예조와 공조판서 판서에 이르렀고 ,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포시(包시)를 데리고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다시 광주 서석산으로 옮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글씨에 뛰어난 그는 특히 팔분체에 정통하여 그의 필체가 [덕린체>]로 불리웠으며
해동필첩에 명필로 기록되어 있다. 아들 포시도 역시 글씨에 능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필명을 떨쳤고, 조선조에 불사하여 절의를 지켰다.
그의 아들 장(檣), 평(枰), 제(梯)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고령신씨의 3대산맥을 이루었는데,
맏아들 장(檣)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라 [남산지곡]을 지었으며,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포시의 둘째 아들 평(枰)은 사간원의 정언을 역임했고, 막내 제(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석(碩)은 무오사화를 피하여 고흥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고령신씨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장의 아들 맹주(孟舟),중주(仲舟),숙주(叔舟),
말주(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그들의 후손에서 삼정승,삼문형을 비롯한 91명의 대과 급제자를 낳았다.
세종때 화려한 문치를 이루게 했던 숙주는 북관정책에 명외교관으로 활약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6대 왕조를 거치면서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조선조의 기반을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명상으로 추앙되었다.
일찍이 그가 젊었을 때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중신들과 더불어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잘 보살피라는 유언을 받았으나, 그는 수양대군을 돕는일에 가담하고 난세에 남아 그재주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59세로 임종에 이르러 한숨쉬며 탄식하기를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고 마는가" 하였으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하였다고
[ 해동악부]에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세조가 숙주의 갈등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던 재치있는 일화가 [필원잡기]에
전한다.
어느날 세조가 영의정 숙주와 새로 우의정으로 발탁된 구치관을 술자리에 불러서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음이 있을테니 그릇 대답하면 벌을 사양하지 못할지어다" 하며 세조가
"신정승"하고 부르자 숙주가 대답하니까 "新 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못했도다"하고는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리고, "구정승"하고 부르니 구(舊)정승을 부르는줄 알고 숙주가 대답하니 구(具)정승을 불렀다면서
또 벌주를 내렸다.
그 다음에 신정승을 부르자 둘다 대답하니까 한사람을 불렀는데 둘다 대답한다고 해서 또벌주를 내렸고, 구정승을 부르니 이제 둘다 대답하지 않자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벌주를 내리면서 세조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숙주의 아우 말주(末舟)는 세조가 즉위한후 권지 정자가 되고 원종이등공신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은거하다가 대사간을 거쳐 전주부윤을 지낸뒤 진주목사와
창원도호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활을 잘쏘는 등 무술에 능했다.
숙주의 아홉 아들 가운데 둘째인 면(沔)은 우승지를 거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이시애의 난에
전사 하였고, 셋째 찬(澯)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넷째 정(瀞)은 이조참판을 거쳐 좌리공신에
올라, 아우 준(浚)과 함께 가통을 지켰다.
문장과 시로 명망이 높았던 종호(從濩)의 아들 항(沆)은 성종의 딸 혜숙옹주와 혼인하여
고원위에 봉해지고 연산군 때 부종관을 지냈다. 항의 아우가 시,서,화 에 모두 뛰어나[삼절]로
불리웠던 잠(潛)이다. 그는 조광조의 혁신정치를 위한 인재발탁 문인 현량과 출신으로 기량과
아량이 있어 인망이 두터웠다.
화원으로 첨정에 올랐던 윤복(潤福)은 시정촌락의 풍속도중에서 특히 기녀 · 무속 · 주점 등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묘사에 치중하여 인간주의적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평가되고 있다.
한말에 와서도 고령신씨는 벌족의 명맥이 더욱 융성하여 의절이 가통을 빛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날 음독자결을 기도했던 여독으로 오른편 눈을 실명하여
[눈흘겨 보는 사람]이란 뜻으로 예관이란 별호가 붙었던 규식(奎植)은 [아목루]란 시문집을
남겼고, 중국 광동정부에 대사로 가서 손문과 교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았고 1922년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보고 조국의 앞날을 근심하며
25일간 단식 끝에 죽었다.
역사가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로서 이름난 채호(采浩)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당시
식민주의적인 일체의 학설을 배격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적인 지도자로 우리나라 언론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홍식(洪植)은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백우(伯雨)는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에서 대동 청년단에 가입, 을사년에 이동녕 등과 이완용의
집을 습격했던 황(滉)과 더불어 이절의 전통가문인 고령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신씨는 남한에 총 27,324가구, 117,33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 , 행정리,
인차리
전남 고흥군 도양읍 가야리
전남 여천군 쌍봉면 해산리
전남 고흥군 점암면 대용리, 남양면 망주리
전남 여천군 화정면 적금리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수리
고령 (申) 고령신종친회 02-544-8880 서울
-강남-청담1-131...(고령신씨회관4층)
고령(申) 고령신종친회 02-544-8880 서울 -강남-청담1-131...(고령신씨회관4층)
평산 평산신씨 대종회 02) 776 - 6111 서울 특별시 중구 수하동
6번지
평산 평산신씨대종중 02-776-7978 서울 -중-수하-6(용궁B601)
평산 평산신씨사간공파종중 02-588-4136 서울 -서초-서초3-1597-4(서초B/D1층관리실)
평산 평산신씨종친회 02-2273-3880 서울 -중-충무로3-24-1(아세아빌딩1층관리실)
평산 평산신씨부산경남화수회 051-463-9616 부산 -중-중앙동6-72...(동방빌딩606호)
평산(申) 무주군 화수회 063-322-0266 대전시 동구 성남 2동
501-26 sin00425@yahoo.co.kr
평산(申) 무주군화수회 대전사무실 042-672-2402 대전시 동구
성남 2동 501-26호 sin00425@yahoo.co.kr
평산(申) 부천시 평산신씨화수회 032-611-7000 부천시 원미구
심곡 2동 405-7 ppp6050@hanmil.net
고령 고령신씨 대종회 043-259-6550 충북 -청주-상당-북문로2-116-102(유신상사)
평산 평산신씨전남도화수회 062-223-7994 광주-동-학2-857-7(6층)
고령 rhfudtlsTl 031-473-0914 안양시 만안구 석수
2동 308-3ㅡ 호림빌라203호 ssw335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