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에 오른 신숭겸 (申崇謙)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의 초명은 능산으로 광해주(춘천지방) 출신인데, 태봉(궁예가 세운나라)의
기장으로 있다가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더불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가 창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으로 대장군에 올랐다.
그후 927년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 군사와의 싸움에 태조와 함께 출정하여 포위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태조와 용모가 흡사한 숭겸이 태조를 피신시키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시신을 잘 보살펴 춘천에 예장하고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에 추봉하였으며,
숭겸의 아들 보장(甫藏)을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대구시 동구 지묘동)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서면 방동리에 있고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으로 알려진
평산과 고령신씨는 전체 신씨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이두본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신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를 잇는 역사의 흐름속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성씨. 본관은 평산(平山) · 고령 (高靈) · 아주 (鵝州) · 영해 (寧海) · 은풍 (殷豊) · 천안 (天安) · 이천 (利川) ·
신천 (信川) · 곡성 (谷城) · 삭녕 (朔寧) · 창주
(昌州) 등 10여 본이 전한다. 그 중 평산신씨가 약 70 % 이상, 고령신씨가
약 20 %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총 302명의 문과 급제자, 11명의 상신, 5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 본래는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지실(多知悉)이었으며 통일신라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영풍군(永豊郡)으로서 성(城)을, 783년(선덕여왕
4)에는 진(鎭)을 두고 한주(漢州)에 예속시켰다.
고려시대 태조 때 평주(平州)로 개칭하고, 성종 때 방어사(防禦使), 현종 때는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원종 때는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 후 1914년 부 · 군 (府郡)통폐합
때 남서부의 일부를 연백군에 이속시켰다.
평산군은 면적 1,323 km2. 인구 10만 5,000명(1943). 동쪽은 금천군, 서쪽은 재령군과 벽성군, 남쪽은 연백군, 북쪽은 서흥군
· 신계군에 각각 접한다 .
군의 북쪽은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험준한 산세를 이룬다. 중앙부는 북쪽으로 치우쳐 멸악산(818 m) · 주지봉
(主之峰:713 m), 서쪽은 백락산(白樂山:547 m) · 운달산 (雲達山:581 m), 남쪽은 목단산(牧丹山:296 m) · 치악산 (雉岳山)
등이 솟아 남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지형배치는 대체로 서고동저(西高東低)를 나타낸다. 따라서 동쪽의 예성강(禮成江) 유역을 제외하면
군은 거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 조건에 영향을 받아 밭이 많다.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숭겸의
11세손 연(衍)의 아들 중명(仲明), 자명(自明), 헌주(憲周)
3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관 중명(仲明)의 아들 [즙]은 고려조에서 전리판서와 수문전 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군평(君平)은 좌대언과 어사대부에 올라 당세에 대학자로 추앙되었던 막내 현(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편 국초이래 명간관(名諫官)이라고 태종이 극찬했던 개는 태조때 충청도관찰사 등 여러벼슬을 거친후 세종때는 이조판서가 되어 북변을 자주 침입한
야인토벌에 공헌했다.
그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447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자준(自準), 자승(自繩), 자형(自衡) 세아들을 불러놓고 대대로 물려내릴 가훈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가르쳤다.
[언충신, 행독경, 소심익익, 대월상제(言忠信, 行篤敬, 小心翼翼, 對越上帝)]의 유훈을 받은
3형제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 관직을 지내며 평산신씨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명인의 아들 익(翌)은 명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으로 나가 치적을 쌓았고, 선조때
제주 목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순천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본래 남대문 밖 청파의 배다리 근처에 살았다. 하루는 집근처를 지나가던 병조판서
[류전]의 행차를 범하여 전도하는 하인에게 끌려가 욕을 당했다. 익은 모르고 범한것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 하여 이 하인을 번쩍들어 도랑에 내던져 버렸다.
이소란을 보고있던 류전은 익을 장하게 보고 임금에게 대장부 하나를 발견했다고 아뢰어
선전관에 특채되었으며, 명종이 서교에 나갔을때 거센 돌풍에 어막의 끈이 끊겼는데 익은
그 끈을 붙잡고 어막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명장으로 유명했던 입(砬)은 1583년 온성부사가 되어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자
선조 임금은 교외에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 맞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손수불러
보검을 내리며 왜군 토벌을 부탁했으나 빈약한 병력으로 적군과 대결하다 참패하자
부하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입(砬)의 아들 3형제중 장남 경진은 공조참의와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올라
훈련, 호위, 포도의 3대장을 겸하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투신해서 죽은 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수 있겠느냐 하며 평생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평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이르러 ,
정사이등공신에 봉해진 아우 경우(景裕), 동성군 경인과 함께 의절의 무맥을 이었다.
숙종때 대사헌에 올랐던 완(玩)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라 희빈 장씨의 처벌을 주장했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건의하여 왕의 승낙을 받았으나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영의정에 올라 평천군에 봉해졌다.
영조때 알성문과에 급제했던 만(晩)은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역시 영의정을 역임한후 기로소에 들어간 아우 회(晦)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한말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팔균(八均)이 토비의 습격을 받고
순절했으며, 대한민국 건국초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부의장을 지내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야당을 영도했던 익희(翼熙)는 자유당
독제정권 치하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평산신씨의 가맥을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