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양순(良洵)은 양탕의 후손이며 682년(신라 신무왕 2) 신라(新羅)에 입국하여 국학에 입학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이 외국인 고관을 꺼렬 승진을 못하게 되자 왕이 한라군(漢拏君)에 봉하게 되어 중시조가 되고 본관을 제주로 하였다.
영주지 (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쪽기슭모흥혈(毛興穴: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년(고려 태조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궁왕자(良宮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에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제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姓)을 양(梁)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순(洵)이 682년(신문왕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제주 (濟州)는 한반도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명칭은 도이(島夷), 주호(州胡), 탐모라(耽牟羅), 섭라(涉羅), 탁라, 탐라(耽羅), 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의 속국이었던 탐라국은 938년(태조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1211년(희종7)에 탐라를
제주라고 개칭하였다. 조선때 1416년에 한라산을 경계로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을
설치하여 통치해오다가 그후 여러차례의 변화를 거쳐 제주도(濟州道)가 되었고,
1946년 도제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현재 2시 2군 6읍 5면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현종때
이부시랑과 중추부사 , 상서좌복야를 지낸 [진]과
녹사 한신(漢臣)의 아들 숙(淑)은 명종때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팽손(彭孫)은 조광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그의 아들 응정(應鼎)은 공조을 거쳐 진주목사를 역임했으며,공조참판에 이어 대사성에 이르렀고,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를 지냈으며, 응정의 아들 산숙(山璹)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을 따라 남강에 투신하였고,
그의 처 이씨(李氏)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에 칼을 찔러 자살했다.
한말에 와서는 회일(會一)이 화순과 동복 등지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강진에서 체포되어
단식 7일만에 순국했으며, 한묵(漢默)은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