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임온 (任溫)은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으로 그의 6세손 임주(任澍)가 1275년(고려 충렬왕 1년)에 충렬왕의
왕비이며 원나라의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하여 경상도
추동 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 감문위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 임씨는 임주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 임자송(子松)과 민부전서
임자순(子順)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 임주의 묘소는 풍천 전석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한다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시조 임 온(任 溫)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豊川)에 사적(賜籍)된 것으로 전하는데 이로 인해 후손들은
풍천(豊川)을 본관(本貫)
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풍천 (豊川)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구을(仇乙) 또는 굴천현(屈遷縣)이라 불리웠던 것을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서기 1018년(현종 9) 방어사(防御使)를 두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
와서 처음으로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다가 태종(太宗)이 풍천(豊川)으로 고쳤다. 그후 은율현(殷栗縣)과 합하여
풍율군(豊栗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송화군(松禾郡)으로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자송 (子松)은 조적의 난때 공을세워
정난공신에 올라서 서하부원군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로서 민부전서를
지내고 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자송의 6세손인 원준(元濬)은 당대의 명관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서하군에 봉해진
후 좌찬성에 일으렀다.
그의 아들 사홍(士洪)은 한어에 정통하고 해서에 뛰어났으며, 두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조선의 예종과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또한 열(說)은 자송의 8세손으로 대사간, 대사헌에 이어 한성부판윤과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자순(子順)의 7세손인 유겸(由謙)은 중종때 대사헌과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공조판서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풍천임씨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유겸의 아둘 추(樞), 권(權), 병(柄)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추는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권(權)은 관찰사 및 예조판서가 되고 지춘추관사를 역임한 뒤 촤참찬에 이르렀다
막내인 병(柄)도 홍문관 박사 및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을 보였다
추의 아들로 형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호신(虎臣)과, 형조 참의에 이른 보신(輔臣), 현감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내신( 臣),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공을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풍천임씨 가문을 빛냈다.
또한 풍천임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로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왜병에 대항하여 전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의 6세손으로 본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이외에도 재사(才士)로 이름난 [광]은 감찰 익신(翊臣)의 아들이며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 참판,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목동가(牧童歌)를 지은 유후(有後)도 예조 참판, 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근세의 명필로 형조참판, 도승지를 지낸 수적(守迪), 대사간, 대사성을 지내고 고금의 시가(詩歌)에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정(挺), 그리고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성주(聖周)와,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으로 통일하여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정주(靖周)는 형제 학자로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 까지 이름을 떨쳐 명문인 풍천임씨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백파 (伯派 : 자송)와
중파(仲派 : 자순)로 크게 나뉘며 두 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임씨(豊川任氏)는 남한에 총 24,682 가구, 103,1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