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씨족보(原州邊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조카 숙(肅:안렬의 형인 안백의 아들)과 함께 공민왕(恭愍王)과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환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의
호(號)을 받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이 되어 나 세(羅
世), 조사민(趙思敏), 이성계(李成桂), 류 실(柳 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지역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을 폐립(廢立)한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復位) 시키려다가 김 저(金 佇)와 함께 순절하였다.
본관은 황주 (黃州) · 원주 (原州)
· 장연 (長淵)의 3본이다.
이밖에도 가은(加恩:聞慶) · 전주 (全州) 등 여러 본이 전하지만, 동일 연
원의 분파로서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다.
송 · 원대 (宋元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져 있다.
황주 변씨의 시조 변려(邊呂)는 원래 중국 농서( 西)지방에 살다가 송나라가망하자 고려에 와서 황해도 취성(取城:黃州)에 살았다고 한다.
원주변씨의 시조는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의 심양로천호(瀋陽路千戶)를 지낸 순(順)이다.
그는 여의 후손이라고 전하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순의 손자인 안열(安烈)이다. 그는 원나라의 병부상서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를 본관으로 받았다.
원주 (原州)는 강원도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로 고쳤다.
그후 일신현, 정원 도호부, 익흥도호부 등을 거쳐 원주목이 되었고 1895년원주군이 되었으며, 1955년 일부가 원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안렬의 충절을
기리고 그의 아들 3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어
맏아들 현(顯)은 봉상시사를, 둘째 이는 도총제를, 막내 예(預)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사를
각각 역임하였고, 손자 상복(尙服)은 덕천옹주와 혼인하여 원주위에 봉해졌다.
한편 예조참판 상회(尙會)의 아들 수(修)는 호조 및 병조,형조,공조의 참의를 거쳐
충청, 경상,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면천 군수 계윤(季胤)의 아들 협(協)은 공조판서와 포도대장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특히 협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쾌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여섯살 때 샘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우물 안에서 돌을 붙들고 밤새 버티고 있다가
새벽에 물을 길러온 아낙네들에게 큰 새끼를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쳤다고하며,
1565년(명종20)에는 제주목사로 귀양온 요승(妖僧) 보우를 장살함으로써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공조 좌랑 열(悅)의 아들 응정(應井)은 임진왜란 때 조헌, 정담 등과 더불어 금산 전투에서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는데, 적장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무덤을 크게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이라 쓴 푯말을 세웠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고향에 내렸다.
또한 만취당 영순(永淳)의 아들 경회(慶會)는 임진왜란때 여러 전투에서 많은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한 흡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헌하여 원흥군에 봉군되어,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던 극태(克泰)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외 효종때 나선정벌에 출정하여 러시아군을 격파시켰던 급과 통역관으로 [노걸대신석]을
편찬한 헌(憲)이 유명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면와(勉窩) 태균(台均)의 주관으로 1924년 경북 봉화읍 거촌리에 구양사를 세워
백산(栢山) 경회(慶會)와, 봉은(鳳隱) 극태(克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祭享)하여 왔다
그후 1984년 후손 교우(敎雨)가 사림(士林)의 공의에 따라 강당을 중수하고 그규모를 확장하여
묘우(廟宇), 전사청(典祀廳), 장서각(藏書閣), 동서재(東西齋), 주사(廚舍), 삼문(三門),
문루(門樓)를 비롯한 기타 부속건물의 신축사업비를 전담하고 구양서원(龜陽書院)이라
이름하여 시조 대은공(大隱公), 백산공(栢山公), 봉은공(鳳隱公)을 향사(享祠)하고 있으며,
약국을 세워 봉화군 지역 영세민에 대한 의약품 무료지급과 사회자선사업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철탑산업훈장과 새마을 포장을 수상했고 사회봉사 부분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명문 원주변씨의 전통을 살렸으며 문중단결을 위하여 전국에 산재한 후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다.
변씨는 조선시대 총 40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변씨 인구의 약 90 %는 원주 변씨가 차지한다.
별좌공파
참판공파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변씨(原州邊氏)는 남한에 총 9,698가구,
39,6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