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변씨 (黃州邊氏)는 중국(中國) 농서 사람인 변 려(邊 呂)가 북송(北宋)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황주(黃州)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황주로 하게 되었다.
「황주변씨세보(黃州邊氏世譜)」에 의하면 변 려(邊 呂)는 1232년(고려 고종19) 몽고병(蒙古兵)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高宗)을 시종(侍從)하는데 공(功)을 세워 상장군(上將軍)로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지고 식읍 (食邑)을 하사(下賜) 받은 것으로 전한다. 가통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려(呂)의 아들(允)이 고려 원종(元宗) 때 서해도 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제주도(濟州島)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우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으며, 9세손 정(靜)은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봉(參奉) 택(澤)의 둘째 아들 이중(以中)이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병마(兵馬)와 군기(軍器)를 수습했으며, 뒤에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輛)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 율(權 慄)을 도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하였고,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장성(長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중(以中)의 맏아들 경윤(慶胤)은 광해군(光海君)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고 학행(學行)로 명성을 떨쳤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대의(大意)를 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로 지평(持平)에 천거된 휴(烋)와 영조(英祖) 때 이름난 학자(學者)였던 괄( )이 유명했으며, 치명(致明)은 한성우윤(漢城右尹)과 공조 판서(工曹判書)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치명의 아들 득양(得讓)은 정조(正祖) 때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