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양씨 (南原楊氏)의 시조는 양경문(楊敬文)인데,
[남원양씨족보]에 의하면 경문은 고려에서
지영월군사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조상들의 토착 세거지인 남원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남원 (南原)은 전라북도의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고룡군인데 뒤에
대방군으로 고쳤으며 신라 경덕왕때에 남원으로 하였고 고려 충선왕때에 다시 대방군으로
하다가 뒤에 남원군으로 고치부르게 되었다
조선때 집의를 역임한 자유 (子由)와
호조 정랑을 지낸 공준(公俊),
그리고 산림은일(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 공말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외에도 춘추관 편수관을 거쳐 부사를 역임한 홍(洪),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나섰던 사형(士衡),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회형(會榮) 및 의병활동을 하다가 옥사한 영(泳)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 양씨는 남한에 총 9,703가구, 40,9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 귀미리
전북 순창군 적성면 지북리, 내월리
전북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청주 청주양씨대종회 02-719-4298 서울
-마포-공덕-82-5(1동)
남원(楊) 남원양씨대종회 063-277-1311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361-8
제주 제주양씨금성군종친회 062-228-7668 광주 -동-금남로5-74...(호수빌딩3층301호)
제주 제주양씨미재공파문산종중 062-265-1432 광주-북-문흥-1002...(3층301호)
남원 남원양씨문경시종친회 054-552-3477 경북 -문경-영순-의곡-449...
본관은 청주 (淸州) · 중화 (中和)
· 안악 (安岳) · 남원 (南原)의 4본이다.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생각되나, 그 분파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定說)이 없다.
《청주양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기(起)는 원나라의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서 고려 충선왕 때 제국공주(齊國公主:元 世祖의 딸, 忠烈王妃)를
배행해와서 상당백(上黨伯:上黨은 淸州의 古號)에 봉해졌는데, 그의 제6자 포(浦)가 중화(中和:平南)에 분적하여 중화양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양씨 측에서는 이를 부인한다.
《중화양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포는 고려 고종 때 정승으로서 당악군(唐岳君:唐岳은 中和의 古號)에 봉해졌으며, 기는 당악군의 장자인 동무(東茂)의
현손으로 기재되었다. 어쨌든 양씨의 유래는 상당백과 당악군의 연대보다도 훨씬 거슬러올라간다. 고려 태조 때의 장군 지(志)를 비롯하여 광종
때의 문신 연(演), 현종 때의 명장(名將) 규(規)와 그 아들 대춘(帶春), 문종 때의 문신 신린(信麟) 등 많은 양씨가 등장하나, 그들의
계보는 분명하지 않다.
중화양씨는 당악군의 5대손 백지(百枝)가 고려 말에 평양 천호(千戶)로서 평양에 자리잡은 이래 그 후손이 주로 평남(平南)을 중심한 일대에
세거하였다.
백지의 7대손 덕록(德祿)은 선조 ∼ 인조 때 학자로서 알려졌는데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종질(從姪) 의직(懿直)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평양 수복과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중화양씨의 대표적 인물인 희지(熙止/稀枝)는 당악군의 7대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가, 1498년 무오사화
때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대사간에 취임하였으나 유자광(柳子光) 등의 참소로 다시 삭직되고, 뒤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복직되었다.
청주양씨는 사준(士俊) · 사언 (士彦) · 사기 (士奇)의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사언은
서예에도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명필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우 사기도 원주목사 · 부평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고 시재 (詩才)도 뛰어났다. 그는 자기가 죽을 날과 시간까지
예언하여 바로 그 시각에 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밖에 청주양씨의 인물로는 단종(端宗) 때 정난공신으로 세조 때 공조판서와 함길도 · 평안도의 도절제사를 지낸 정 (汀)이 있다.
남원양씨도 많은 인물을 낳았는데 중종 ∼ 명종 때 산림은일 (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공말과, 그의
종형으로서 중종 때 문과에 올라 부사 · 호조정랑을 지낸 공준 (公俊)의 일가는 호남 순창(淳昌) 지방에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특히 공준의 아들 홍(洪), 홍의 아들 사형(士衡), 사형의 아들 시진(時晉) · 시우 (時遇) 형제 등 일가 4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았다.
양씨는 조선시대 27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인구 3만 472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60위였고,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만 9387가구에 인구
8만 1267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55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