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비밀번호
회원가입  |  아이디, 비밀번호 찾기
2026년
음 : 09-17
양 : 10-27
서기:2026년
단기:4359년
불기:2570년
위아래 - 세상 끝난 뒤에도 -
 
 home > 뿌리 > 성씨의 유래 

휘 (諱): 유삼재(兪三宰), 아찬(阿찬)

기계 (杞溪)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기계현으로 개명하여 의창군(義昌郡)에 예속시켰으며,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속했다가 후에 폐현(廢縣)이 되었고, 현재는 영일군에 편입된 기계면(杞溪面)이 되었다.

기계 유씨 (杞溪兪氏)는 신라 때 아찬(阿 )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 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 후 기계 유씨는 의신(義臣)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승추(承樞)의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와 동정(同正) 진적(晉迪)의 계통인 장사랑공파(將士郞公派) 등 크게 열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기계 유씨는 , 사재감 주부(司帝監主簿) 여해(汝諧)의 후손인 전서(典書) 현(顯)의 아들 효통(孝通)이 태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의약에 정통하여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藥用植物)을 정리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 문명(文名)을 떨쳤다. 한편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응부(應孚)는 기계 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특히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 (嚴壯)하고, 활쏘기를 잘하여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응부(應孚)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평안도 병마절제사(平安道兵馬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禍)를 입었다.

친국(親鞫)을 받을 때 세조(世祖)가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 하니 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의 고발한 바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하였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다리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가죽과 살이 다 익었다. 응부는 얼굴빛이 변치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하며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는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렸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을 듣고 아내가 원통해 한 것은 그의 원통한 죽음이 아니라 살았을 때 한번 잘 먹고 잘 자보지 못했던 가난을 가엾이 여겨 울었다고 하며, 관에서 역적이라 하여 가산을 몰수하는데 갖고 나간 것이 짚자리 한 장 뿐이었다고 「동각잡기(東閣雜記)」와 「추강집(秋江集)」에 적고 있다. 사재감 주부 여해(汝諧)의 7세 손 참판(參判) 해(解)의 아들인 기창(起昌) 연산군 때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직간(直諫)을 하다가 다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

이들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죽음의 사자 (使者)가 바다를 건너 오는가를 기다리고 살았다.

어느 날 기창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바다를 건너 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 사람과 영결(永訣)한 후 깨끗하게 옷을 갈아 입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그 도사가 가져온 전갈은 교사령(絞死令)이 아니라 중종반정의 소식과 그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그의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기용한다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갈을 보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겠다"하며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고 통곡하고는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하고, 자신은 고향인 비인( 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 신주(神主)에 옛 벼슬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만 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 그 많은 국신(國臣) 가운데 연산군에게 학대받고 연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은 홍언충(洪彦忠)과 유기창(兪起昌) 두 사람뿐 이었다.

기창의 아들 여림(汝霖)과 여주(汝舟)는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의 기묘현량(己卯賢良)으로, 형인 여림은 예조 판서를 지냈으나 아우 여주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書藝)로 일생을 마쳤으며 글씨에 뛰어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림의 아들 강(絳)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병조 참판과 한성부 판윤, 공조·호조 판서를 지냈다. 특히 그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글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의 유생(儒生)들이 중앙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門下)에서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叛事件)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삼등공신(平難三等功臣)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 院君)에 봉해졌던 홍(泓)은, 여림의 손자이며 생원(生員) 관( )의 아들로 종계변무(宗系辨誣)에도 공을 세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석학(碩學) 조 식(曺 植)에게 극찬을 받았다.

대수 (大修: 진사 함의 아들)는 선조 때 주서(注書)와 전적(典籍)을 거쳐 형·호·예조의 좌랑(佐郞)을 지내고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 10년 간 외직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대칭(大 : 강의 손자)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대일(大逸)의 아들 백증(伯曾)은 성품이 강직하여 권신에 아부하지 않기로 유명하여 말직에만 머물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을 세워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고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하여 <충박신(忠朴臣)> 또는 <유충박(兪忠朴)>으로 불리웠다.

그가 경상 감사로 나가 윤선도(尹善道)의 실정(失政)을 논박했고, 대사간으로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으며, 이조 참판으로서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下獄)을 청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부총관(副摠管)으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하여 화의(和議)를 주장한 윤 방(尹 昉)과 김 유(金 )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는 등 강직한 척화파(斥和派)로서 누차 직언(直言)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탑(御榻)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므로 인조도 백증(伯曾)의 고집 때문에 무척 골치를 앓았다고 하며 <유고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다.

효종조의 명신이며 학자로 유명한 계(棨 : 참봉 양증의 아들)는 윤리(倫理)와 예법(禮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항거했던 인물로,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숙종(肅宗) 때 간행된 그의 저서(著書)인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중심으로 노소론(老少論)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그 외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글씨에 능했던 하익(夏益: 수증의 손자)과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서인(西人)의 가장 과격한 문신(文臣)으로 남인 타도에 앞장섰던 명일(命一: 선공감역 비의 아들),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한 소론 일당을 숙청했던 명웅(命雄), 영조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던 명홍(命弘) 등이 뛰어났으며, 목사(牧使) 명건(命建)의 아들 최기(最基)는 병조 참의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우참찬을 역이마여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척기(拓基),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시)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시문(詩文)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언술(彦述)과 더불어 가문을 증흥시켰다.

그 밖의 인물로는 1787년(정조 11)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언호(彦鎬: 우윤 직기의 아들)가 좌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고, 한전은 순조 때 백년(百年) 이래의 대 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아 서예(書藝)에 능했던 한지(漢芝),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환(莘煥), 고종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판서에 오른 치선(致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한말(韓末)에 한 성부민회장(漢城府民會長)을 지낸 길준(吉濬)은 새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기초한 진오(鎭午)와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기계 유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437 가구, 97,382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기계 (兪)    기계유씨대종회    02-846-9196    서울 -영등포-신길-1367...(부운빌딩503호기계유씨종친회)   
기계    기계유씨부산종친회    051-757-9222    부산 -수영-광안4-379...(유원빌딩708호)
기계(兪)    충목공파    011-9825-2018    대전시 유성구 복룡동 134-11    skyu72@hanmail.net
기계(兪)    기계유씨충목공파광주종중    031-791-0105    경기 하남시 신장동 대유빌딩 7층 523-4   
 
 
 
 
위원회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제휴문의 | 광고문의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민주로 32번길 29 (쌍촌동)     상호명 : 광산탁씨전자족보운영회
단체고유번호: 410-80-40462  대표: 탁인석    전화번호 062-374-0045
© HUMEN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