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정숙 (鄭肅)의 선조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이 해주 수양산 밑에서 살았던 선비집안으로
고려 때 정씨를 하사받았다고 전해온다.
그는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내고 혈통을 이어왔으나 전쟁로 문헌이 소실되어 2, 3대의 계대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 말기에 정숙의
후손 정언, 정초(鄭礎)형제를 각각 1세조로 하여 2파로 분류하고 본관을 해주로 했다.
시조 정 숙 (鄭 肅)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는 상고(詳考) 할 수 없고, 다만 그의
조상(祖上)이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던
사족(士族)이었으므로 후손들이 숙(肅)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으로 소부
소윤 (小府少尹)을 지낸 언과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초(初)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두파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해주 (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때 내미홀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이 폭지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성종때 와서는 별호로 대령(大寧) . 서해(西海) 등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 60명의 문과급제자와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린 해주정씨는 대표적 인물로 찬성(贊成)을 지낸
정이를 비롯, 이조참판 정석견(鄭錫堅),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효준(鄭孝俊)
등을 꼽을 수 있다.
정이(鄭易)는 1383년 문과에 급제하고 좌정언(左正言), 사헌지평(司憲持平),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1411년 한성부윤으로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이 되었다. 그후 충청도관찰사, 예조와 형조 및 호조의 판서, 대제학 등을 거쳐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이르렀다.
정효준(鄭孝俊)은 1623년 인조반정 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1656년 해풍군(海豊君)에 봉해졌다. 그후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연산군 시절 난세에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일화의 주인공 정희양(鄭希良)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연산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었다. 그는 일찌기 왕에게 간언(諫言)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해로 유배되어 3년만에 풀려나왔다. 마침 모친상을 입어
고향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던 중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 후 갑자사화 때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는 시문에 능했고 음양학(陰陽學)에도 정통하였다.
정희양 외에도 175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그후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른 정운유(鄭運維)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해주정씨(海州鄭氏)는 남한에 총 8,427가구, 34,7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