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오학인은 도시조 오첨의 17세손으로
시문에 정통하고 벼슬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오학인은 1035년(고려 정종 1년) 문과에 급제하고 1057(고려 문종 11년)에 사목으로 압강에서 북쪽 오랑케를 토평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고창으로 했다.
고창의 향현사, 평산의 죽림사에서 제향한다.
고창 오씨 (高敞吳氏)의 시조(始祖)
오학린(吳學麟)은 외적(外敵)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
이 고창(高敞)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고창 (高敞)은 전라북도 남서부 서해에
면한 지명으로, 백제때 모량부리현이라 하다가
신라때 고창이라 하였고, 조선시대에 고창현, 고창군으로 바뀌었으며,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질 (質)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질의
아들 세문(世文)은 동각시학에 이르렀다.
세문의 형 세공(世功)과 동생 세재(世才)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는데, 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세재(世才)는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었다.
세문의 중손인 계유(季濡)는 고려 충숙왕때 좌리공신으로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으며, 계유(季濡)의 손자 엄(淹)이 조선 태종때 경기도 수군절도사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엄(淹)의 손자 원찬(原纘)은 상장군에 이르렀다.
그밖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운(澐)은 정유재란때도 커다란 공을세워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3 · 1운동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화영(華英)이
가문을 빛냈는데, 특히 그는 목사로서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함양에 노력하였으며
조선민족당 당수(黨首)와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남한에 총 6,380가구,
27,7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황해도 평산군 용산면 일원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원
경북 월성군 외동면 개곡리
황해도 벽성군 서석면 연근리
해주 (吳) 해주오씨종친회 02-353-5527~8 서울
해주(吳) 해주오씨종친회 02-333-7624 서울 -마포-서교-480...
해주(吳) 해주오씨대동종친회 02-547-8574 서울 -강남-청담1-76...(푸른샘빌502해주오씨대동종)
동복 동복오씨대종회 02-536-5553 서울 서초 -방배-88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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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 오씨문중구산단소 051-721-9404 부산 -기장-철마-와여-317-3
낙안(吳) 낙안오씨 종친회 011-454-8363 충남아산시온천 2동삼정하이츠아파트101/308 ows123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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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 동복오씨대동보소 062-234-8555 광주-동-금-18-1
오 오씨종친회 062-268-0036 광주 -북-문흥-953...
오씨는 문헌에 164~210본이 있으나
16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와 시조는 알 수가 없다.
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연릉 사람인 태백이 세운 오(吳)나라에 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류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
우리나라 모든 오씨의 도시조는 류양의 46세손이며 500년(신라 지증왕 1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오첨(吳瞻)으로서 그는 함양에서
22년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두아들 중에 둘째 아들 오응이 그대로 함양에 남아서 살았다고 한다. 그후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 살았는데 후손 오연총(吳延寵, 오첨의 18세손)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 우리나라
오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오연총의 6세손 오수권(吳守權)이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1216년(고려 고종 3년) 계단을 토평한공으로
큰아들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에 봉해져서 해주 오씨의 시조가 되고,
- 나주, 울산, 락안, 고창, 함평, 평해로 분관
둘째 아들 오현좌(吳賢佐)는 동복군에 봉해져서 동복 오씨의 시조가 되고,
- 군위로 분관
셋째 아들 오현필(吳賢弼)은 보성군에 봉해져서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화순, 함양, 장흥, 흥양로 분관
성씨. 본관은 문헌에 210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거의 모두 오씨들의 분포지역에 지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해주(海州) · 동복 (同福)
· 보성 (寶城) · 고창 (高敞) · 두원 (荳原) · 나주 (羅州) · 함평 (咸平) · 울산 (蔚山) · 낙안 (樂安) · 평해 (平海)
· 군위 (軍威) · 의성 (義城) · 장흥 (長興) · 함양 (咸陽) · 화순 (和順) 등이다. 《오씨대동보(吳氏大同譜)》에 의하면 울산
· 낙안 · 고창 · 함평 · 나주 · 평해는 해주오씨에서 , 군위는 동복오씨에서, 장흥 · 두원 · 화순 · 함양은 보성오씨에서 분적했으며
, 오씨의 도시조는 첨(瞻)으로서 신라 지증왕 때 중국에서 건너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그의 둘째 아들 응(膺)은 그대로
남아 함양에서 살았으며, 그 뒤 응의 12대손 광우(光佑)가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의 현손 연총(延寵)이 고려 문종 때 다시 한국에 건너와
정착했으므로 연총은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그는 고려 예종 때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女眞)을 토벌하고 이부 · 예부 · 병부의 판서를 역임한
명신이다 . 연총의 5세손 수권(守權)이 현보(賢輔) · 현좌 (賢佐) · 현필 (賢弼)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3형제가 고려 고종
때 침입해온 거란군(契丹軍) 토벌에 공을 세워 각각 해주군(海州君) · 동복군 (同福君) · 보성군 (寶城君)에 봉해지고,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씨의 대종(大宗)인 해주오씨의 일부에서는 대동종친회의 이러한 고증에 반대하고 고려시대 군기감(軍器監) 인유(仁裕)를 해주오씨의
시조로 하고 있다. 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9명,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을 비롯하여 공신 8명, 청백리 3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해주오씨가 상신 2명, 대제학 3명, 공신 2명, 청백리 1명과 많은 현신을 배출하여 가장 열력이 뛰어나고, 그 밖에 동복오씨
· 나주오씨 · 보성오씨 등에서도 많은 인물이 나왔다 . 오씨는 해주오씨 · 보성오씨 · 동복오씨의 3본이 전체 오씨 인구의 90 % 이상을
차지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6만 8085가구에 인구 38만 4990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2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만
7127가구, 전국 가구 구성비 1.5 %로 순위가 274성 중 제13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