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 장정필 (張貞弼:문헌공)의 5세손이며,
이부시랑(吏部侍郞) 지현(之賢)의 네째 아들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흥양군에 봉해졌다.
시조 장선익이 흥양군에 봉해졌으므로
,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흥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고흥군 (高興郡) 지방의 조선시대
행정구역 명(名)으로, 고려 초에는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1285년(충렬왕
11)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935년(태조 4)에
보성군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397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 현감(縣監)를 겸임하게 하였다. 1441년(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고쳐 군수(郡守)를 두었으며, 1914년 고흥군으로 개칭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익 (善翼)의
아들 정일(正鎰)이 고려에서 예부시랑을 지냈고, 손자 보초(保超)가 현령을
역임하여 목사 극명(克明), 중랑장 명(明)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외 중랑장을 지낸 원(元)과, 철(哲)은 군수를 지낸 원검(元儉), 부령을 역임한 인철(仁哲), 봉훈랑에 오른 송백(松栢)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흥양장씨는 남한에 총 59가구, 2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남 안주군 동면 일원
덕수 덕수장씨종친회 02-444-5855 서울
광진 -자양-225-48
인동 인동장씨직제하공 02-388-3791 서울 은평 -갈현-285-230
장씨 장씨종친회 02-2245-7686 서울 성동 -용답-230-9
흥성(張) 흥덕장씨 02-743-6426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
주공아파트 101동 101호 jks5512@hanmail.net
인동(張) 인동장씨 대종회 053) 743-4365 대구 수성구 범어
1동 804-42 진홍빌딩 4층
인동 인동장씨양월종중회관 054-276-4403 경북 -포항-남-장기-양포-465...
인동 인동장씨임은공문중 054-931-6551 경북 -성주-용암-선송-85...
인동 인동장씨칠곡군종친회 054-973-1268 경북 -칠곡-왜관-왜관-224
인동 인동장씨포항시종친회 054-249-5714 경북 -포항-북-동빈1-73...
인동(張) 인동장씨화천종친회 011-367-3698 화천군 화천읍 아리
239-2 jsk1946@hanmail.net
중국 (中國)의 고대(古代)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오제(五帝)가 있었다. 그 중 맨 처음의 임금인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는 문자. 수레, 선박 등을 만들고 도량형, 역법, 음악,
잠업 등의 문물제도를 확립시킨 전설적인 명군(明君)으로 추앙을 받은 임금이다.
황제(黃帝)의 둘째 왕자인 소호청양(少昊靑陽)에게는 영특하고 재주가 좋은
휘(揮)라는 아들이 있었다.
왕손 휘(揮)는 궁정(弓正) 벼슬에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관찰하다가 남쪽 하늘에 아홉 개의 별이 마치 시위에
화살을 먹인 모양으로 떠 있는 호시성(弧矢星)을 발견하였다 한다. 휘(揮)는 곧 별자리 모양을 본따서 활과 살을 만들어 수렵과 전쟁에 이용하였으며,
이후 활과 화살은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무기로 가치가 높아 그 보급이 날로 확산되었다.
위력적인 활과 화살을 잘 이용한 황제(黃帝)는 중국의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고, 궁시(弓矢)의 성능에 감복한 황제(黃帝)는 휘(揮)로 하여금
사당을 지어 매년 호성(弧星)에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휘(揮)의 후손(後孫)에게 활을 의미하는 '궁(弓)' 자에 '장(長)'를 더해서 "張" 성(姓)을
주었다고 하는 전설이 중국 『씨족통지(氏族通知)』에 전해지고 있다. 또, 춘추 전국시대 진(晋)나라의 해장(解張)은 자(字)를 장후(張侯)라
하였는데 그 후손(後孫)이 번창함에 장씨(張氏)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춘추전국시대에 웅변가로 유명한 장의(張義), 한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장량(張良), 유비(劉備)의 휘하에게
용맹를 떨친 장비(張飛), 송(宋)나라의 대유학자 장재(張載) 등 수 많은 인물들이 장씨(張氏)로서 명성(名聲)를 드높였고, 근래의 중국
성씨 조사에 의하면 장씨(張氏)의 수는 우리 나라 총인구를 상회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장씨(張氏)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많은 인물이 활약하고 있다. 백제인(百濟人)으로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宋)과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파견된 장위(張威)와 장무(張茂), 신라(新羅) 시대 청해진(淸海鎭) 대사로 유명한 장보고(張保皐), 발해 무왕 때
장수로 당의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를 공격한 장문휴(張文休)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음은 '장(張)'이라는 성씨(姓氏)가 이미 삼국
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장씨(張氏)의 존재는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해지고 계속 선진 문화가 전래되면서 성(姓)이 없던 평민들이
관직을 얻고, 귀족으로 상승하는 과정에서 성이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의 원이름이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평민 시절의 이름이라 생각되며 당(唐)에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이란 관직을 얻는 과정에서 姓(姓)이 필요하였기에 '궁(弓)'자와
연관된 장씨(張氏)로 성(姓)을 택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高麗) 왕조가 개창되면서 장씨 인물 상당 수가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귀족 세력에 새로이 편입된
후 다른 씨족(氏族)과의 구별, 또는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높이기 위한 것이고, 과거나 음서에 의한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조상(祖上)의
내력(來歷)이나 성씨(姓氏)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사성(賜姓)과 창성(創姓)을 통한 장씨 득성(得姓)이 많아졌다는 볼 수 있다.
장씨의 본관(本貫)은 『동국문헌비고』에 4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관향(貫鄕)은 30본(本) 미만이다.
그 중에서 덕수(德水) 장씨와 절강(浙江) 장씨를 제외한 모든 장씨는 우리 나라의 토착인(土着人)이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평민의 위치에서 점차 지배층으로 상승하는 과정에서 창성(創姓)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