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
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날 이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째 되는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떼는 어느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묘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있다.
본관은 문헌에 149본이 전하지만, 파평(坡平)
· 해평 (海平) · 남원 (南原) · 칠원 (漆原) · 무송 (茂松) ·
함안 (咸安) · 해남 (海南) · 해주 (海州) · 예천 (醴泉) · 야성
(野城) · 기계 (杞溪) · 양주 (楊州) · 현풍 (玄風) · 죽산 (竹山)
· 고창 (高敞) · 평산 (平山) · 영천 (永川) · 여주 (驪州) ·
신녕 (新寧) · 덕산 (德山) 등 20여 본이 현존한다.
그러나 해평 · 무송 · 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모두가 파평윤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며 , 그 중 남원윤씨 · 함안윤씨 · 야성윤씨 ·
신녕윤씨 등은 파평윤씨로 환보 (還譜)하였다고 한다.
윤씨는 파평윤씨의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가 전체 윤씨 인구 중에서 가장 많고, 해평윤씨가 다음을 차지한다.
경기도 (京畿道) 파주군(坡州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파해평사(波害平史) 또는 액봉현(額蓬縣)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파평(坡平)으로 고쳐져 내소(來蘇 : 양주)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서원(瑞原)과 파평(坡平)을 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고, 1461년(세조 6) 세조(世祖)가 왕비(王妃)의 고향이라고 하여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신달의 현손 관 (瓘)이 고려 선종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1107년 여진정벌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도판서 승례(承禮)의 아들 번이 세조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 우참찬 판중추원사 등을 지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번의 아들 삼형제 중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을 지내고 영돈령부사에, 둘째 아들 사윤은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정난공신으로 영평군에,
셋째 사흔은 좌리공신으로 우의정에 오름으로써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사분과 사흔은 두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가 배출되니,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판개성부사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은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성종때 영의정에 올랐던 필상(筆商)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세워, 우참찬에 특진되고 적개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으로 서정도원수를 겸하여 건주위 토벌에 공을세워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된후 사약을 받았다.
필상의 증손 현(鉉)은 호조판서, 돈령부사에 이르러 청백리에 녹선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국간집(菊磵集)을 저술했다.
목사 은(垠)의 아들로 세종때 좌찬성과 영중추부사를 지낸 사로(師路)는 정현옹주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으며 세조때 좌익공신에
책록되었다.
특히 파평윤씨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강(絳)과 그의 아들 지미(趾美), 지선(趾善), 지완(趾完), 지경(趾慶),
지인(趾仁)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그중에서 병,이,공조판서등을 지내고 좌의정에 오른 지선과 어영대장과 예조판서를 역임한뒤
우의정에 올라 청백리에 족선된 지완이 뛰어났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종때 영의정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에 오른 인경(仁鏡)과 영조때 대사간,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이른 동도(東度)가
뛰어났으며, 학자로 명망 높은 정(鼎)과 경남(慶南), 낙(洛) 등은 학문으로 가통을 이었다.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준희(俊熙)와 창석(昌錫), 기섭(琦燮), 해(海) · 애경 (愛卿), 석구(錫求), 현진(顯振) 등이
구국의 신념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일본군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을 폭사시킨 의사 봉길(奉吉)은 학문과 충절의
전통 가문인파평 윤씨의 전통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