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씨 (林氏)의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 한림 학사(翰林學士)였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가
있자 동래 8학사(東來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 왔으며,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에 정착(定着)하였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한 평택(平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평택 (平澤)은 경기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하팔현이었는데,
고려 때 평택으로 고치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 1914년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 1924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었다.
세춘의 아들 재 (梓)가 예의판서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고, 증손 정(整)이 조선 태종때 예조판서에 올랐고, 현손 명산(命山)이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평택 임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선의 명장 경업(慶業)은 세춘의 12세손이며 중추부사 황(篁)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무과에 급제, 소농보권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이괄의 난때에 공을 세워 진무원 종일등공신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도처에서 적국을 무찔러 영웅적이고 전설적인 용명을 떨쳤으며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경업의 형 형업(亨業)도 병자호란때 모친상을 당한 관계로 피난을 못가 청군에게 붙잡혔으나, 청군(淸軍)이 [효자는 해칠 수 없다]라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효자, 충신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졌으며, 숙종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어 명망높은 평택임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또한 언수[彦修]를 1세조로 하는 또다른 일파에서는 그의 아들 성미[成味]가 고려말 우왕때 공을 세워 삼사우사에 이르렀고, 견미[堅味]는
문하시중을, 재미[齊味]는 판개성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